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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인 <그랜 토리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배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2009년 3월 19일 목요일 | 박정환 객원기자 이메일


<그랜 토리노>는 걸작이다. 거장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시대의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 무엇인지 또한 조용히, 하지만 필사적으로 보여준다. <체인질링>에 이어 다시금 관객을 찾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다각도로 살펴봤다.

이민자에 대한 색다른 시각

미국은 만인이 다 알다시피 이민자로 이루어진 국가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해 온 것을 필두로 유럽계의 백인계 이주자는 말할 나위 없거니와 노예무역의 결과로 유입된 애프로 아메리칸, 국경에 근접한 멕시칸과 남미 히스패닉, 아시아 이주민들까지 합쳐 인종의 용광로로 형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당연히 순혈주의에 근간한 민족주의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나라다. 이러한 다민족 국가는 1차 대전 직후 독일이 겪었던 아리안 혈통의 순혈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 같은 오만함에 빠질 염려는 없는 대신 각 인종의 화합에 있어 골머리를 앓는다는 단점이 부각된다. 실제로 애프로 아메리칸, 쉽게 말해 흑인은 지난 20세기 중반 마틴 루터 킹의 평화주의에 입각한 투쟁의 결과로 공공연한 인종차별의 장벽이 없어지기까지 엄청난 차별을 겪어야 한다. 비록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었다고는 하지만 WASP 계열의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다보니 피부색이 다른 유색인종은 본의 아니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 쉬운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

다민족 인종의 용광로 미국은 잠재된 사회불안요소가 인종차별이라는 구실로 폭발하기 쉬운 뇌관을 지닌 국가라는 특징을 가진다. 로드니 킹 폭동사건이 그 단적인 사례인데 백인 경찰에게 폭행당한 심적 응분을 흑인들은 가해자로 대표 집단화되는 백인들을 습격하지 않고 황인계 상점, 그중에서도 다수의 한인 상점이 폭도들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약탈당했다. 어째서 흑인들은 백인이 아닌 황인에게 마음 속에 쌓인 인종차별이라는 응어리를 대리배설 했을까. 메인 스트림인 백인계 아메리칸에게 보복의 칼날을 대기에 그들은 수적으로나 영향력으로나 흑인보다 우세했다. 그렇다면 그들 흑인보다 만만하면서도 그들의 울분을 해갈할 상대는 누구였을까. 바로 황인이었다. 부지런한 근면함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갖춰나감으로 흑인들의 경제권을 잠식해 나가면서, 그리고 수적으로는 흑인에게 열세였던 이들 아시안 아메리칸을 희생양으로 만들기엔 안성맞춤 격. 각기 다른 인종들은 미합중국이라는 한 배를 타고 있지만 사회적 불안요인이나 잠재적인 위협 앞에 노출되면 이들은 희생양을 찾기 쉽다. 그리고 이 희생양은 자신보다 수적으로 열세인 인종이나 집단을 희생양으로 몰아가기 쉽다. 미국에서 편견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 이들은 바로 이민자들이다.

<그랜 토리노>는 미국 문화에서 주류로 나타나는 앵글로 색슨이나 애프로 아메리칸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다인종 가운에서도 수적으로 열세인 아시안 아메리칸에 포커스를 맞추고 영화를 전개한다. 그렇다면 이들 황인종이 미국 주류 사회 안에 적응하지 못한 비적응자 혹은 잠재적 범죄가능성이 내재된 사회부적응자로 묘사될까. 그건 아니다. 영화는 이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를 미국 안에서 견지하면서도 법의 테두리를 일탈하지 않는 집단군으로 그린다. 영화에서 사회적 규율을 부수거나 위협하는 요소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타오(비 방)가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972년제 명차 그랜 토리노를 밤중에 몰래 훔치려고 하는 시퀀스에서 나타난다. 타오는 이 차를 소유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몽족 갱단에 입회하기 위한 입문식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도둑질이라는 철없는 행동을 한다는, 동기화를 보면 용서 가능한 일시의 일탈화 과정이다.

하지만 나머지 다른 한 가지 형태의 잠재적인 규율 위협자는 몽족 갱단으로, 이들은 타오와는 달리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잠재적인 범죄 가능성을 지니고 규합된 자들이다. 미국의 정상적인 규범의 테두리 안에 포함되길 원치 않는 이들은 기관총을 들고 다니며 몽족 마을 안에서 잠재적 범죄군을 형성하는 자들이다.

영화는 미국의 국민 역할을 수행코자 하는 황인 이민자들과 몽족 갱단을 구분해냄으로 이들 몽족 이민자들을 뭉뚱그려 집단적인 사회 부적응자 혹은 범죄 가능 예비군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흔히 유색인종들에게 범하기 쉬운 - 잠재적인 범죄 유발 가능성이 높은 집단으로서 유색인종을 설정하는 오류를 <그랜 토리노>에서는 배제하고 평범한 몽족과 용인된 사회 규범에서 일탈화된 몽족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한다.

물론 영화 중반부까지 카탈스런 이미지를 보여주는 월트는 보통의 WASP 아메리칸이 행할 수 있는 편견의 오류, 즉 인종차별이라는 시각에서 자유롭지는 못한다. 몽족 황인종에 대해서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던 그의 시각은 수와 타오를 통해 서서히 열려지기 시작하면서 개선된다. WASP라는 미국 사회의 메인 스트림이 바라볼 때 몽족 같은 피부색이 다른 이민자를, 미국 사회 내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를 유발하기 쉬운 잠재적인 범죄군으로 일반화하고 마는 사고방식의 오류를 영화는 거부한다. 소수에게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기 쉬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암묵적인 차별 가운데엔 집단화의 오류가 숨어있다.

고슴도치 딜레마의 주인공, 월트

주인공 월트는 예전에 한국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참전용사로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타인과 친화적이고 사교성이 많은 사람이기보단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꺼리고 사람들과 정서적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전형적인 고슴도치 딜레마에 속하는 인물이다. 월트가 고슴도치 딜레마에 속한다는 건 그가 친아들과 맺는 관계 안에서 발견된다. 고슴도치 딜레마란 - 겨울에 고슴도치 무리가 추위를 면하기 위해 서로가 모이면 고슴도치 서로의 가시에 의해 서로가 상처 입게 된다. 이에 고슴도치는 무리 지을 수가 없이 겨울밤을 홀로 지나게 되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면 서로의 가시 때문에 상처 받아 뿔뿔이 흩어져 있던 고슴도치들은 밤사이 얼어죽고 만다는 딜레마를 총칭한다.

월트의 아들과 며느리는 월트의 일상사와 건강에 관심 갖기 보다는 월트의 재산과 집에 관심이 더 많은 속물근성을 지닌다. 제사보다는 잿밥에 관심 많은 아들 내외는 아버지 월터를 방문함에 있어서도 순수한 부자지간의 정으로 아버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를 양로원에 모시고 월터가 평생 축적해낸 재산을 부산물로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월트, 월트는 아들 내외가 사갖고 온 전화기 등을 일절 받지 않고 이들을 박정하게 내보낸다. 아들 내외는 나름대로 상처 받고, 월트는 월트대로 피붙이에게 이용 받는다는 느낌만 팽배해서 상처 받는다. 함께 더불어 있음으로 서로에게 힘이 보태지는 관계가 아니라 고슴도치처럼 만나면 서로가 상처 주는 존재다. 월트는 이용당한다는 배신감에, 아들은 피붙이 아들에게 물질적 배려 하나 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야속함으로 서로 상처 입는다. 이들의 심리적 거리감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화할 때,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화할 때 서로가 진심으로 바라는 용건을 확인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안부인사로 겉돌고 마는 시퀀스를 통해 파악 가능하다.

가족과도 이러한 지경인데, 하물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과는 오죽하랴. 바로 이웃집의 몽족 일가들이 어떤 삶을 영위하는지,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관해서는 일절 관심이 없고 냉담하기까지 한 사람이 바로 월트다. 어린이들과 마음의 담을 쌓고 추운 겨울과 같은 나날을 지내는 - 문학 중 오스카 와일드의 <욕심쟁이 거인>과 일정 부분 오버랩 되는 주인공 월트는 가족에게서도 찾지 못하는 정을 이웃에게서 찾게 될 리 만무했다. 한밤중의 몽족 갱들의 난동을 장총 한 자루로 진압한 월터에게 감사하는 동네 사람들의, 꽃다발과 같은 호의들을 불필요한 호의로 간주하고 불편하게 받아들일 정도니 말이다. 하나 월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구심점이 되는 캐릭터는 수(아니 허)다. 손녀딸 같은 친근함으로 월트에게 다가서는 인간미와 친화력의 소유자인 - 인정에 대해 새삼 각인시켜 주고 월트의 차 그랜 토리노를 도둑질하려던 시도로 서먹한 타오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 수가 아니었다면 영화 속 월트의 인간미를 일깨우긴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월트가 이토록 타인에게 냉담하고 일정 부분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노비치(크리스토퍼 칼리) 신부의 고해성사 권유를 한사코 마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월트 마음에 응어리진 트라우마 때문에 그는 반평생 가까이를 고뇌 가운데서 지낸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의 원인은 한국전 참전 당시 현재의 타오 혹은 타오보다 어린, 소년병으로 참전한 중공군을 사살했기 때문이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대에 저지른 잘못은 월트에게 죄책감으로 남았고, 이는 평생 월트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는다.

노병은 죽지 않았다. 더티 해리의 부활

하지만 월트는 트라우마에 일평생을 얽매이진 않는다. 수를 통해 교감의 감정과 과정을 서서히 조금씩 알아가게 되고, 이는 타오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형성하는 계기로 발전함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발판으로 도약하기에 그렇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위기가 찾아온다. 몽족 갱단이 퇴근 길의 타오에게 린치를 가하고 이에 월트는 갱단 중 한 명에게 물리적 보복을 행사하는데, 그만 이 불똥이 월트가 아닌 수와 테오의 집, 그리고 수에게 잔혹한 상흔의 자취로 튀고 만다. 몽족 갱단을 망나니 상태 이대로 용인하는 것은 월트의 사고관으로서는 결코 용인되지 않는 심적 처사이기에 월트 나름대로의 단죄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고유의 방식이자,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21세기적 회귀이자 변용이며 부활로 대변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 신작 <체인질링>에서도 서부극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부조리 전복과 모성애를 감동적으로 담아내는 영화지만 이 가운데서도 마카로니 웨스턴의 정서를 한 마디 대사로 함축해내지 않던가 - “먼저 싸움을 걸진 않되 마무리는 내가 한다.”

<체인질링>의 크리스틴이나 <그랜 토리노>의 월트를 가만히 살펴보면 싸움은 이들 주인공이 먼저 걸진 않았다. <체인질링>에서는 부조리한 LA의 사법기관과 공권력이, <그랜 토리노>에서는 몽족 갱단들이 먼저 주인공들에게 도전을 가해온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주인공들은 물리적으로 맞대응하지 않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배우로서 명성을 날리던 웨스턴 마카로니 방식으로서의 직접적이면서도 물리적 폭력 행사가 아니라, 관객의 심미안을 매혹하는 심오하고 우아한 방식으로 변형된다. 몽족 갱단에 대응하는 월트의 방식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이자 관객의 감정선을 부여잡고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정의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웨스턴 무비에서의 악의 응징 과정은, 율 브린너의 <황야의 7인>(1960) 같은 경우와 같은 특별한 예외가 아닌 경우에는 그 유명한 <셰인>(1953)과 같은 방식으로 홀로 정의를 수호한다. 영화 속 월트 역시 패거리 의식이 아니라 웨스턴 무비 속 정의의 사도가 홀로 일처리를 하듯 홀로 몽족 갱단과 맞선다. 마카로니 웨스턴의 대리자이자, 더티 해리의 변주곡임을 대변하는 영화 후반부 시퀀스는 월트의 속죄 예식을 대변하기도 한다. 속죄 예식이 아니라면 굳이 월트가 자노비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을 이유가 없었으리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새롭게 부활시킨 21세기형 더티 해리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으로는 주인공 월트의 마초이즘 전이(轉移)다. 이는 더티 해리적 수호자의 가치관과도 간접적으로 연계되는 것으로, 아직은 자신의 소유를 보전하기엔 미숙하고 유약한 남성상을 보여주는 타오에게 이발사 친구를 통해, 노역을 통해 강인함과 터프함의 가치관을 이식해 준다. 더티 해리적 가치관의 전이이자 마초이즘의 재생산을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월트가 타오를 세상에 내보내기 이전에, 세상에 홀로 맞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마초이즘 양성 과정이자 강인한 남성성의 대를 잇는 (월트-타오) 복제 과정임을 보여준다.

순혈주의 가족관의 해체

이번 영화를 제작하기 이전부터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순혈주의 가족관의 해체는 이번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관계는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사제지간이다. 하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은 혈육으로서의 부녀지간 이상으로 끈끈하고 견고한 인간관계를 구축해 내는데, 이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수와의 인연으로 맞닫은 타오와 월트의 관계는 처음에는 예비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나게 된다. 하나 타오 가정에서 바라는, 일종의 속죄 방식으로서의 월트를 위한 봉사 방식은 돌처럼 단단히 견고한 월트의 마음 문을 서서히 부식시킨다. 월트의 마음 문을 열게 만든 이가 수라면,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철옹성을 부식시키는 이는 예비 가해자 타오다. 타오에게 서서히 마음 문을 열어가는 월트는 전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의 닮은꼴은 아닐지언정 변주곡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월트의 피를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아들과 손자들의 작태는 어떠한가. 손자손녀는 할아버지에게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방약무인, 무례하기까지 하다. 월트 할아버지의 차 그랜 토리노에 잔뜩 눈독 들이는 손녀의 밥맛 어린 눈빛을 영화 속에서 보라. 토악질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아들과 며느리는 한 술 더 떠 월트의 떡고물만 바라보는 한심한 가족 군상을 대변한다.

월트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지간인 타오와 수지만, 객관적으로 관람객들이 바라볼 때 월트의 직계가족들보다 이 이방인 남매에게 애정 어린 눈길이 더 많이 가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이는 직계 혈통을 이어받는 생태학적 가족관에 대한 일종의 전복이자, 심성적이고 정서적인 동인으로 결속화된 이방인 대 이방인의 단단한 결합이 순혈주의 가족관을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상 도전이기도 하다. 이방인 대 이방인의 결속을 가능케 하는 요인인 ‘정’은 고유의 동양적 정서관을 대변하기도 한다.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 어떤 색의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 사물의 인식관이 달라지듯 한 영화를 바라봄에 있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조망 가능할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한평생을 몸바친 노장의 역작 <그랜 토리노>를 바라봄에 있어서도 위와 같은 관점의 다양한 조망이 가능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의 호소력에 관객이 얼마만큼 몰입되고 캐릭터에 이입되느냐 하는 부분일 것이다.

2009년 3월 19일 목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무비스트)

26 )
mvgirl
멋진 감독, 그 고집스러움에 박수를   
2009-03-22 09:14
akqjqwhgdk
멋쟁이 신가~~ㅋㅋ   
2009-03-21 20:15
bsbmajor
만수무강 하소서..   
2009-03-21 19:44
mckkw
클린트 이스트우드   
2009-03-21 14:42
gaeddorai
장수하시길   
2009-03-21 10:09
hyosinkim
그랜토리노 보고 싶네요~   
2009-03-20 18:11
podosodaz
박수를!!!   
2009-03-20 14:57
kwyok11
아낌없는 박수를!   
2009-03-20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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