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분위기가 깊어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마틴 스콜세즈 감독 영화에서 그렇게 빛이 나는 이유?”에 대해, “아마 스콜세즈 감독이 영화의 역사를 잘 알고, 캐릭터, 카메라 등에 능하기 때문이다”라고 응수한 것을 비롯, ‘조니 뎁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할까?’라는 질문에, 올란도 블룸의 “돈 때문에 출연하는 일이 없고,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대답, 남동생과 동반한 키어스틴 던스틴이 ‘옷이 예쁘다’는 분위기띄우기용 질문에 “협찬받은 옷이라 돌려줘야해요~”라는 애교섞인 답변 등을 펼치면서,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예년과 다름없이 특유의 흥분을 예고하고 있었다.
시침과 분침 흘러흘러, 우리나라 시각 오전 10시 30분, 찰리 채플린과 ‘슈렉’이 함께 걸으며, 점점이 사라져가는 인트로 필름이 끝나자, 드디어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그 두근거리는 일정이 거행됐다.
올해 시상식 진행자는 배우이자 작가, 제작자 등 다방면에서 활약 중인 크리스 락. 객석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별다른 퍼포먼스없이 차분히 등장한 그는 작년에 진행을 맡았던 빌리 크리스탈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영화제를 꾸려갔다. 영어의 뉘앙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상당히 애매한 독설과 조크를 쏟아낸 그의 진행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또다른 재미로 작용하기도. 예를 들면, ‘<몬스터볼>로 할리 베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때, 니콜 키드먼은 자신의 수상인냥 너무너무 좋아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말로 연기상 수상감이었다!’와 같은 농담이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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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24개의 아카데미 트로피 가운데, 첫 번째로 발표된‘미술상’을 <에비에이터>가 거머쥐면서, ‘이 영화가 작년 <반지의 제왕> 처럼 싹쓸이하는 거 아니야?’라는 묘한 흥분이 객석에 슬쩍 감돌았다. 이어 ‘남우조연상’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Million Dollar Baby)>의 모건 프리먼이 수상했다. 그가 호명되자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던지면서, 아카데미는 초장부터 뭉클 분위기가 유발됐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모건 프리먼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만드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모든 분들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특히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감사한다”는 수상 소감을 전했다. 프리먼은 <용서받지 못한자(Unforgiven)>로 이스트우드 감독과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로빈 윌리엄스가 시상자로 나선, ‘장편 애니메이션상’은 예상됐던 대로 <인크레더블>이 가져갔는데, 사회자 크리스 락은 “내년에는 흑인판 <인크레더블>이 나올거다”라는 농담을 잊지 않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이런 저런 이벤트가 끼어들기 마련. 그중 가장 웃겼던 건, 극장으로 출동한 크리스 락이 일반 사람들에게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작품들을 봤나?는 질문을 던지며 코믹하게 엮은 인터뷰였다. 요약하자면, 관객들의 반응과 평단의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비틀어서 보여준 이 인터뷰는, 시상식 초반부터 거침없는 독설을 던진 크리스 락의 분위기와 딱 맞는 컨셉이기도.
크리스 락의 소개인즉, ‘정치적인 발언으로 우리를 재미없게 만드는’ 팀 로빈스가 시상자로 나선 ‘여우조연상’은 <에비에이터>의 케이트 블란쳇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유력한 후보자였던 <클로저>의 나탈리 포트먼은 그녀 덕분에 고배를 마시게 됐다. 의상이며, 헤어스타일에서 우아한 자태가 넘실댔던 블란쳇은 “이 영화로 캐서린 헵번을 잘 알게 됐다. 그녀의 모습을 연출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했다. 아마도 그녀가 오랜 세월 연기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듯하다”는 수상소감을 전했다.
‘미술상’, ‘의상상’, ‘여우조연상’에 이어 <에비에이터>가 ‘편집상’을 수상했을때까지만 해도, 상복의 여신(女神)은 11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에 빛나는 <에비에이터>에게 내려앉는 듯했다. 특히 수상자 텔마 슌메이커가 “스콜세즈 감독님, 이 상은 당신과 내가 같이 받는 상이다”라며, 감격에 젖어 얘기했을때 이를 바라보는 스콜세즈 감독의 왠지 애잔한 표정도 뭔가 일어날듯한 분위기였던 것(허나 그뒤 ‘촬영상’을 수상하고나서, <에비에이터>는 더 이상 어떤 부문에서도 호명을 받지 못했다...).
이번 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작년 <반지의 제왕>에 비한다면, 여러 영화들에 골고루 트로피가 나뉘어졌던 편. <사이드웨이(Sideways)>가‘각색상’, <스파이더맨 2>가 ‘시각효과상’, <레이>가 ‘음향상’, <인크레더블>이 ‘음향편집상’, <네버랜드를 찾아서>가 ‘작곡상’,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주제가상’,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이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다채로운 수상 결과를 배출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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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처음 만들 때부터 나도 오스카 수상을 꿈꿨다. 그런데 처음 만든 영화가 오스카 후보에 올라 나는 내가 잘난 줄 알고, 아무한테도 감사하지 않았다...지금, 감사하다고 전할 사람이 너무나 많다. 모호할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직업을 갖게 해준 영화에게 감사한다”는 멋들어진 수상 소감을 전한 후, 알파치노와 어깨동무를 한 채 나란히 무대를 벗어나는 모습은 눈시울을 자아냈다(오스카 감독상에 4번이나 노미네이트 됐지만, 한번도 수상하지 못했던 시드니 루맷 감독은 이무영의 말대로, 오스카의 맹점을 드러내는 것일수도...).
▶ 막판에 필받은 '밀리언달러 베이비', 짜릿한 노른자 수상!
‘주제가상’ 발표 이후, 아카데미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주요 부문 수상작들이 드디어 속속 발표됐다. ‘남녀주연상’, ‘감독상’, ‘작품상’이 그것. 먼저, ‘여우주연상’은 유력한 후보자였던 아네트 배닝을 제치고,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힐러리 스웽크가 차지했다. 특히 <소년은 울지 않는다>로 스웽크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이미 한차례 수상할 당시, 아네트 배닝은 <아메리칸 뷰티>로 그녀와 경합을 벌였었다. 결국, 그로부터 5년뒤인 올해도 아네트 배닝은 또 한 차례 아이러니한 씁쓸함을 맛보게 됐다.
두 번째 수상탓인지 스웽크의 수상 소감은 실속 그 자체. 감사할 사람들을 무수히 열거하던 그녀는 ‘이제 끊어달라’는 무~서운 음악 소리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다소 빽빽(?) 질러가며 호명을 완수했다. 그런 그녀에 비한다면, <레이>의 제이미 폭스는 감동 그 자체. 막강 라이벌이었던 <에비에이터>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누르고,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는 무대에 오르자마자 레이 찰스의 모습을 재연하며 노래를 불렀고, 소감 말미에 자신의 할머니와 얽힌 뭉클한 사연을 실어 객석을 숙연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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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했지만, 남은 ‘작품상’도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가져가면서, 장장 6시간에 걸친 아카데미 시상식은 올해도 막을 내렸다. 5개 부문 수상으로, 표면상으로는 최다 수상한 <에비에이터>. 하지만 <에비에이터>는 영양가있는 주요상을 <밀리언달러 베이비>에 뺏기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한편, 기대를 모은 박세종 감독의 <버스데이 보이(Birthday Boy)>는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트로피를 안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