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해” 그 한마디 고백이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서연(수지)을 만난 승민(이제훈)은 자신을 마음을 숨긴 채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녀 곁에 머문다. 겨울 방학을 알리는 종강 날, 드디어 용기를 내 준비한 고백의 단어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오해로 인해 고백은 시도도 못한 채 무너지고, 첫사랑은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15년 후,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승민(엄태웅) 앞에 불쑥 나타난 서연(한가인)이 말하다. “너 옛날에 약속했었잖아. 나 집지어준다고. 기억 안나?”
첫사랑이라는 흔한 소재가 주재료지만 <건축학개론>이 재료를 다듬고 쌓고 이어나가는 방식엔 그만의 개성이 있다. 건축과 출신인 이용주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야의 속성을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식시킨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공간과 지리 건축물들은 첫사랑의 정서에 밀도 높게 봉사하는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로 기능한다. 사랑과 건축의 상관관계는 대사에서도 발견된다. 승민은 15년 만에 나타난 서연의 개인사를 꼬치꼬치 캐물으며 “집을 지으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좋은 집을 지울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다가가야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첫사랑은 서툴러서, 이해가 부족해서, 오해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너무나 많은 이유로 갈라지고 찢겨져 버린다. 생에 처음 찾아온 사랑이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가 90년대 학번들에게 조금 더 반짝거리는 건 사랑의 건축의 상관관계 뿐 아니라 기억과 시간의 함수관계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삐삐가 핸드폰을 대신했던 시대의 영화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로 인해 생긴 오해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하드1기가 사양의 최신식 컴퓨터로 “그땐 그랬었지” 웃음 짓게 한다.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과 015B의 ‘신 인류의 사랑’이 라디오로 흐를 때의 감흥,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CD 플레이어의 이어폰으로 나누어 듣던 대목에서는 추억에 흠뻑 취하게 된다.
<건축학개론>은 로맨스 멜로 영화가 여성 관객에게 보다 파급력 강한 장르라는 생각을 잠시 잊게 한다. 오히려 이 영화는 여성보다 남성의 기억에 침투해 마음에 흔들어 놓을 공산이 크다. 과거의 승민은 진실을 확인한 후 상처받는 게 두려워, 진실을 확인하지 않기 위해 도망친다. 순수했지만 비겁했던, 진심 어렸지만 어설펐던 승민. 그런 면에서 승민은 김현석 영화의 주인공들, 그러니까 <스카우트>의 호창(임창정)과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병훈(엄태웅)과 겹친다. 이들에게 ‘과거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해서 ‘안타까운 사랑’이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망가뜨려 ‘후회되는 사랑’이기도 하다. 다만 <건축학개론>은 영화 막바지에 다다라 남성들의 판타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준다는 면에서 김현석의 남자들과 조금은 다른 노선을 취한다.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 깔끔한 설계도면(시나리오)위에 질감 좋은 재료(배우)들도 유기적으로 직조됐다. 엄태웅과 한가인이 건물 전체를 떠받드는 콘크리트 역을 견고하게 담당한다면, 수지가 그 콘크리트에 여러 빛깔을 펴 바르며 활기를 더한다. 건물에 보다 풍부한 감성을 그려 넣는 건 이재훈이라는 놀랍도록 감성어린 배우의 힘이다. 완성된 집을 다시 돌아보게끔 하는 풍경이라면 납뜩이 역의 조정석.(조정석의 팬들, 특히 그가 연기한 헤드윅을 본 관객이라면 보다 큰 웃음을 얻을 수 있을 게다. 96년도에 출연한 ‘뽀드윅’을 보는 듯하다.) 이용주라는 설계자의 감각적인 연출 능력도 빼놓을 수 없다. <건축학개론>은 한국 멜로영화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가슴 벅찬 순간이다.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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