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늑대의 습격, 혹한, 굶주림까지. 완벽한 서바이벌의 조건이 마련되자 생존자들은 그대로 생존리얼리티의 주인공들이 된다. 블록버스터의 풍미를 마련했지만 흐릿한 회색 빛 와이드스크린에 담긴 설원 위 사투는 처절한 시에 가깝다. 시공간이 정확히 가늠되지 않는 이곳은 알래스카, 수색대도 찾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이다. 이 차갑고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소규모 사회가 구축된다. 리더, 보안관, 협력자, 문젯거리까지, 적절히 역할을 나눠가지면서 <큐브> <미스트> <파리대왕> 등 극한 상황 속에서 시현되던 사회의 압축판이 마련된다. 여기에 <더 그레이>는 조역들은 휘발시키고 리암 니슨이 연기한 리더 오트웨이와 늑대의 사투에 집중한다.
영화는 사투라는 단어에 들어맞는 상황을 연이어 마련한다. 비행기 추락, 늑대의 습격, 절벽 횡단 등 도미노처럼 위험은 찾아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 이렇게 생존이라는 목표는 공포를 훌륭하게 제조한다. 초반은 미드 <로스트> 이후 비행기 추락 씬의 한 획을 그을 만큼 강렬하다. 그밖에도 나무에서 추락하는 장면과 폭포에 떠내려가는 장면 등의 실감나는 카메라워크는 감각과 오락을 겸비한 테크니션으로서 조 카나한 감독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부분들이다. 감독은 여기서 조금 욕심을 내고 <더 그레이>를 축조한다.
인간은 극렬한 공포에 놓이면서 신을 찾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더한 공포가 기다릴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일어선다. <더 그레이>는 후반부에 가서 대자연이라는 공포 앞에서 신을 부르는 인간의 모습으로 철학적인 옷을 걸친다. 격렬한 재난 액션을 밑그림으로 그리고 연극적인 캐릭터로 수를 놓은 후 철학적 정점을 찍으려 한다. 물론 재난 액션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대면하는 상황을 실존주의적인 문제로 승화시키는 것은 순전히 노장 액션 배우 리암 니슨의 힘이다. 사고 바로 전날 삶을 포기하려고 한 자에게 가장 강렬한 생존과의 사투를 짊어지게 하면서 아이러니한 시험에 들게 한다. 강한 아버지라는 아우라와 액션으로 부지런히 필모를 쌓고 있는 노장 배우 리암 니슨은 <더 그레이>의 얼굴이자 주제의 수호자로서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다. 홀로 광포한 늑대를 앞에 두고 시구를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마지막 실루엣은 시적이다.
2012년 2월 14일 화요일 | 글_프리랜서 양현주(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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