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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귀족에서 기괴한 대두 여왕까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헬레나 본햄 카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 김도형 기자 이메일


고풍스러운 영국 귀족의 이미지

196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헬레나 본햄 카터는 영국의 수상이었던 H.H. Asquith의 증손녀일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Anthony Asquith를 배출한 명망 있는 가문의 자손이기도 하다. 은행원인 아버지와 정신치료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병환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학창시절 글짓기 대회 입상 상금으로 에이전시에 등록해 연기를 시작한 이후, TV영화를 시작으로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절의 헬레나 본햄 카터는 고전적인 소녀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렸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에 깊이 있는 검은 눈동자는 순수함을 주고, 동그란 얼굴에 하얀 피부는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이런 그녀의 매력을 알아본 사람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었다. 제임스 아이보리는 <전망 좋은 방>에 그녀를 캐스팅해 전 세계에 얼굴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인연은 <하워즈 엔드>까지 이어졌다. 가장 전형적인 영국풍의 영화에, 영국풍의 감독이, 영국풍이 물신 나게 연출한 영화에는 영국풍이 가득한 배우들이 출연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전통적인 영국풍의 배우는 헬레나 본햄 카터였다. 누구보다 고전적인 의상을 잘 소화했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순결하고 고결한 이미지를 여리듯 강인하게 잘 보여줬다.

이러한 매력은 제임스 아이보리만 본 것이 아니다. 프랑코 제페렐리는 <햄릿>에서 오필리아 역을 맡겼으며, 케네스 브래너는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상대역으로 그녀를 낙점했다. 하지만 영국풍의 캐릭터와 영국풍의 외모와 영국풍의 연기 톤은 헬레나 본햄 카터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시대극에만 출연하면서 현대와 동떨어진 과거의 사람 같은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고전미로 이름을 알렸지만, 획일화된 이미지 때문에 자신의 캐릭터에 갇혀 현대로 넘어오질 못했다. 여기에는 전형적인 미인형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개성이 강한 그녀의 외모가 현대극에 맞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드레스와 레이스, 코르셋과 같은 고전적인 소품 없는 헬레나 본햄 카터는 뭔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거장들이 알아본 그녀의 매력

헬레나 본햄 카터에게 첫 번째 전환기를 가져단 준 것은 우디 알렌의 <마이티 아프로디테>다. 우디 알렌을 비롯해 F. 머레이 에이브러햄, 올리피아 듀카키스, 피터 웰러, 미라 소르비노 등 여러 배우들과 함께 출연한 이 작품에서 헬레나 본햄 카터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자신의 매력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제부터 드레스를 벗고 현대적인 의상을 입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아니다. 시대극에 영원한 안녕을 고한 것이 아니라 시대극과 현대극의 교집합을 만들며 폭을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

<마이티 아프로디테> 이후, 그녀의 캐스팅 폭은 넓어졌다. 폴 그린그래스(맞다. <본> 시리즈와 <그린존>의 바로 그 폴 그린그래스!)가 <비행의 이론>으로 그녀와 함께 했고, 고전 원작을 가벼운 터치로 그린 <십이야>에 출연하면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기는 헬레나 본햄 카터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모호한 시절이기도 했다. 다양한 장르에 테스트라도 하듯 기웃거렸지만, 제임스 아이보리 풍의 이미지를 벗은 그녀에게 새로운 색을 칠하기에는 다소 난해함이 있었다. 현대극도, 시대극도, 가벼운 드라마도 어색한 옷을 입은 듯 불편해 보이기만 했다. 그러다가 데이빗 핀쳐를 만났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데이빗 핀쳐는 헬레나 본햄 카터에게 밀라 싱어를 맡겼을까? <파이트 클럽> 이전까지 헬레나 본햄 카터는 그다지 도발적이지도, 그다지 파격적이지도, 그다지 퇴폐적이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한 없이 깊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거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에 더 익숙했다. 캐릭터로는 갑자기 <파이트 클럽>의 밀라 싱어를 연기할 ‘꺼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헬레나 본햄 카터는 너무도 완벽하게 그 역할을 해냈다. 부서질 듯 강하고, 도발적이며 순종적이고, 퇴폐적이면서도 정숙한 도무지 알 수 없는 캐릭터를 특유의 개성으로 완벽하게 연기했다.

<파이트 클럽>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전망 좋은 방>이나 <하워즈 엔드>로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헬레나 본햄 카터는 퇴폐적인 매력이 가득한 도발적인 성녀가 됐다. 하지만 새로운 경지에 올라선 그녀는 한 가지 캐릭터에 만족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에 이언 소프트리 감독의 <도브>에 출연하며 <파이트 클럽>과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도브>를 통해 비평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그녀는 1990년대를 정리하고 문제의 2000년대로 접어든다. 문제의 팀 버튼 감독과 함께.

팀 버튼을 만나다

헬레나 본햄 카터의 2000년대는 팀 버튼을 빼고 얘기할 수가 없다. <혹성 탈출>에서 함께 작업한 두 사람은 인생까지 같이 작업하게 되고, 이후 <빅 피쉬> <찰리와 초콜릿 공장> <유령 신부>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2000년대 들어서 팀 버튼이 연출한 모든 영화에 출연하며 새로운 존재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드레스와 코르셋이 어울렸던 고풍스러운 전통미는 잊혀진지 오래고, <파이트 클럽>의 밀라 싱어는 상징으로 남게 됐다.

퇴폐적이고 도발적인 매력의 헬레나 본햄 카터는 팀 버튼을 만난 뒤로는 엽기적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물론 남편이 부인을 망가뜨릴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여하튼 가늠하기 힘든 특별한 역할은 전부 헬레나 본햄 카터의 몫이 됐다. 팀 버튼의 머리속에 있는 온갖 음울하고,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엽기 발랄한 이미지가 헬레나 본햄 카터를 통해서 스크린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팀 버튼은 그녀를 원숭이로 만들고, 쭈글쭈글한 마녀로 만들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시체로 만들고, 음산한 표정으로 식인파이를 요리하게 하더니 결국엔 엄청난 대두의 붉은 여왕으로까지 연결시켰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가난한 엄마를 제외하면(이건 분량 자체가 너무 적다) 어느 하나 정상적인 역할이 없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헬레나 본햄 카터는 어떠한 진기한 캐릭터라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재능을 보였다.

보통의 여배우라면 출연 자체가 어려웠을 캐릭터였지만, 헬레나 본햄 카터는 그보다 더 세게, 더 강렬하게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여배우로서의 아름다움은 포기한 듯 상상의 극단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즐겁게 연기했다. 헬레나 본햄 카터와 팀 버튼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영화에서는 물론이고 영화 밖의 실제 생활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엽기적인 모습을 보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남편의 영화만을 바라보며 배우로서의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와 <터미네이터 4: 미래전쟁의 시작> 등에도 출연하며 블록버스터와의 연인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붉은 여왕

팀 버튼과의 작업은 최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까지 이어지고 있다.(이변이 없는 한 다음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만) 특히 이 영화에서 헬레나 본햄 카터는 팀 버튼의 단짝으로 익숙한 조니 뎁보다 더 강한 임팩트를 전한다. 더욱이 보통의 여성들이 지독히도 싫어한다는 얼굴이 크게 보이는 캐릭터를 여배우로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CG까지 동원해 머리를 더 크게 만들고, 이마를 확 드러내고, 엽기적인 하트 입술과 부담스러운 파란 아이쉐도우까지 했다. 붉은 여왕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백미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앨리스도, 조니 뎁이 연기한 미친 모자 장수도, 붉은 여왕의 카리스마 앞에서는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다.

3D 입체영화로도 관심을 받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원작의 재해석에 팀 버튼의 우울한 동화라는 점으로도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개봉된 후에는 헬레나 본햄 카터의 모습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다른 장면에서는 공간을 표현해서 3D 입체효과를 줬지만, 헬레나 본햄 카터는 커다란 머리 자체만으로 입체감, 부피감, 공간감을 다 표현했고, 짧게 딱딱 끊어지는 대사는 짧지만 강하게 관객에게 웃음을 줬다. 여배우로서 하기 힘든 난해한 캐릭터를 계속 해왔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붉은 여왕은, 가히 팀 버튼과 헬레나 본햄 카터의 완성형 조합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헬레나 본햄 카터는 시대를 대표하는 미녀는 아니다. 출연만 하면 몇 억불씩 벌어들이는 흥행 보증수표도 아니고 이슈를 몰고 다니는 셀러브리티도 아니다. 하지만 영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고, 연기파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으며, 팀 버튼의 독특한 캐릭터를 조니 뎁보다 더 완벽하게 소화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두 아이의 엄마이고,(팀 버튼과의 사이에는 한 명의 아이가 있다) 패션 사업을 하는 비즈니스 우먼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주로 기억하는 헬레나 본햄 카터의 이미지는 고풍적인 영국 숙녀, 퇴폐적인 성녀, 그리고 팀 버튼의 다양한 엽기녀들이다. 캐릭터의 이미지가 실제 자신의 모습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상, 헬레나 본햄 카터는 분명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다른 배우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캐릭터조차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특별한 능력은 아무한테나 있는 게 아니니까.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사진제공_한국 소니 픽쳐스 릴리징 브에나 비스타 영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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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yyrr1004
오호라 그렇군요   
2010-03-29 22:17
kbk59863
개성강한 배우~   
2010-03-29 20:25
loop1434
멋지네요   
2010-03-2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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