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비열한 흥행영화감독으로 변신한 당대의 인기작가 김연수가 영화제 프로그램팀장과 에로물이나 찍어대던 여배우를 동시에 농락하는 모습을 보았다. 구경남의 “다음 영화는 꼭 200만이”라는 굳센 다짐도 들었다.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말하라는 훈계도 들었다. 이제 홍상수는 <첩첩산중>을 통해 똥차를 몰고 전주로 내려간 작가지망생을 인기작가 은희경의 고향집 계단에 앉히고 “외로워서 이용했던” 교수를 만나 술을 마신 후, 촉망받는 신인작가인 옛 남자를 불러내려 기어이 모텔로 향하게 만든다. 왜? “당신들도 그러잖아” 많이 보던 장면이고 어김없는 술판이며 질펀한 육체의 도리질이다. 그런데 불쾌하거나 찝찝하기는커녕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 나온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의 욕망을 무작위로 집어서는 한순간에 흩날리는 식으로 ‘일상성’에 천착해온 홍상수의 영화에서 섹스에의 위선적 욕망이 사라짐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이제 홍상수의 인물들은 섹스를 위해 술 마시지 않는다. 적어도 <해변의 여인> 이전까지, 술은 섹스로 가는 직행버스였다. 하지만 당대의 인물들은 무명작가의 삶에 연민을 품지도 않고, 부잣집 아들과 직장상사 사이에서 갈등하지도 않고 애써 길 위에서 남자를 구하지도 않으며, 잘난 지식인의 언변에 넘어가 술김에 침대로 직행하는 일 또한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이전까지의 홍상수 영화가 위선과 욕망이라는 질료를 핀셋으로 집어 현미경 유리판에 올려놓는 방식이었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기점으로 삶의 편린들을 포클레인으로 집어 허공에 날리고는 망원경으로 보고 싶은 것을 쫓아가며 보라는 식으로 펼쳐낸다. 그의 영화제작이 날로 속도를 더해가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홍상수는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으로 천의무봉의 솜씨를 뽐내며 거푸 영화를 완성시키고 있다. 올 한해에만 세 편의 영화를 완성했고 신년 1월부터 크랭크인이 잡혀있으니 제대로 감 잡은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해를 거듭할 수 록 대사의 묘미가 살아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데, 이는 초기작에서 보여준 내러티브의 비선형성을 현실적 대사로 돌파하겠다는 시도이자, 소비욕망의 주체적 인물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진영은 방을 잡아놓고 기다리는데 반해, 미숙은 전 선생 손에 이끌려 모텔로 들어갈 정도로 소극적이다. 그녀가 옛 남자친구와 섹스를 한 것은 무의미한 행위였고 만취한 상태에서 홧김에 벌어진 일이었을 뿐이다. 이로써 홍상수 영화의 흐름을 역행하는 캐릭터의 탄생. 쇼가 시작되기 전 바람을 잡을 대로 잡아놓고는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까. 때문에 “좋은 건 자기가 다 하면서”라고 제아무리 투정을 부려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진영과 전 선생이 일상과 위선과 욕망이라는 홍상수의 영화언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동안 그녀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방황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테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홍상수 영화에서 현지인이 주도권을 빼앗긴 적이 있었던가? 정주하는 인간이, 뿌리 내린 삶의 터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홍상수만큼 역설적으로 설파한 작가가 또 있었던가. 우리가 오해한 홍상수가 여기에 있다. 그는 유목하는 인물을 통해 정착된 삶을 희구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빚어진 오해와 갈등을 재료로 삼아 일상성이라는 제법 거창한 담론을 지속적으로 생산해왔다. 그러니 여전히 문제는 현실이다.
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