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시즌, 스크린 확보 전쟁
‘주말 하루에만 88만 명 돌파’, ‘주말 4일간 280만 명 돌파’, ‘역대 최단 기간 100만 돌파’ 등의 문구는 영화의 흥행을 보장하는 문구다. 단기간 내에 관객이 들었다는 것은 매주 새로운 영화가 등장하는 개봉작 전쟁터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방법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고, ‘상황이 이 지경인데 이래도 안 볼래?’하는 식의 협박성 느낌도 농후하다. ‘빈익빈 부익부’의 극명한 사례로 드러나는 경우다. 하지만 이것이 오롯이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만은 아니다. 영화도 엄연히 산업이다. 단지 영화를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없다. 배급을 통한 스크린 확보와 마케팅 능력은 흥행 1위 타이틀을 거머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얘기는 어제 오늘 거론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불법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기도 하기 때문에 특정 영화에 대해, 어떤 현상에 대해 섣불리 ‘독과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사실 부담스럽다. 하지만 단어 사용의 유무를 떠나 실제로 많은 영화와 배급사들은 스크린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의 조사에 따르면 6월 24일 개봉한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 2>’)의 경우에는 개봉 첫 주에 1,214개의 스크린을 확보해 우리나라 전체 스크린 2,136개(영진위 통합전산망 기준)의 57.8%에 해당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트랜스포머 2>가 개봉한 그 주에, 영화를 보려는 국민의 반 이상은 <트랜스포머 2>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종 기록이 양산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러한 이유로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은 영화의 전쟁이 아니라 스크린 확보의 전쟁이다. 여름 시즌을 노려 제작된 국내외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적절한 개봉 스케줄과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대작과 맞붙어봐야 서로 손해이니, 적당한 기간을 두고 개봉해야 하는데, 매주 만만치 않은 경쟁작들이 등장해 이 역시 뜻대로 안 된다. 특히 많은 돈을 들여 제작한 영화나, 비싼 수입가로 들여온 영화들은 더 많은 스크린을 확보해야 한다. 배급사들은, 소위 돈이 될 영화들에 스크린을 몰아줘 큰 이윤을 남기려 한다. 박스오피스 상위 10위까지의 영화들이 차지하는 스크린 수는 절대적이다. 8월 7일부터 9일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66편의 현재상영작 중, 단 13편의 영화만이 두 자리 수 스크린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 외 53개 영화는 한 자리 수 스크린, 그 중에서 47개 영화는 5개 이하의 스크린에서 상영 중이다. 말 그대로 개봉은 하고 있으나 찾을 수 없는 영화들이 부지기수다. 이들 중에는 교차 상영으로 하루 1회 상영을 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흥행 대작을 만들어내는 배급의 힘
기본적으로 영화가 재미있어야 관객이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단지 재미만으로 많은 관객과 만날 수는 없다. 엄청나게 재미있지 않아도 대다수의 스크린을 확보하면 흥행작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영화가 같은 조건으로 경쟁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극장과 배급사는 될 영화에 많은 스크린을 몰아준다. 물론 재미없는 영화에 많은 스크린을 몰아줄 리는 없다. 상식적인 선에서 재미있다고 판단되는 영화에 많은 스크린이 할애된다.(물론 흥행 예상은 빗나가는 일도 종종 있다) 한 배급사에서 여러 영화를 극장에 걸 때, 개봉 시기와 스크린 수는 중요한 전략이다.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될 영화(혹은 되어야만 하는 영화)에는 경쟁작과의 시간차를 두로 비교적 많은 스크린에서 개봉한다. 이후에는 재미와 마케팅 등 영화 자체의 몫이다. 물론 관객이 많이 드는 흥행작이라고 해서 영화의 만듦새까지 좋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영화 발전의 딜레마는 사실 이런 부분에 있다.
개봉 3주 만에 750만을 넘긴 <해운대>의 경우, 쟁쟁한 여름 블록버스터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작품이다. 아니 살아남았기보다는 여러 조건에 의해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말이다. 893개 스크린에서 시작해 지난주 881개, 이번 주 700개의 스크린에서 상영 중이다. 이는 3주차라는 시간과 쟁쟁한 경쟁작들이 즐비한 여름 시즌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 엄청난 수다. 비수기에 개봉한 <박쥐>는 개봉 첫 주에 610개, <천사와 악마>가 612개,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이하 <터미네이터 4>’)이 790개, <마더>가 753개, <박물관이 살아있다 2>가 669개인 것과 비교하면 <해운대>의 3주 차 700개 스크린은 현실적으로 압도적인 수치다. 게다가 8월 6일 개봉한 블록버스터 기대작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이 개봉하는 주임에도 스크린이 많이 줄지 않았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지.아이.조>는 개봉 첫 주에 514개 스크린에서 출발하면서 다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대조를 보였다.
올 여름 대작들은 CJ엔터테인먼트에서 배급하는 작품들이 두각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CJ CGV에서 많은 스크린을 할애하면서 흥행을 지원 사격했다. <트랜스포머 2>가 그랬고, <해운대>와 이번 주에 개봉한 <지.아이.조> 역시 그렇다. 롯데엔터테인먼트에서 배급한 <터미네이터 4>는 790개 스크린에서 시작했으나 <마더>의 개봉에 한 주 만에 2위로 내려왔고, 3주차에는 스크린 수가 579개로 줄었다. 다른 흥행작들과의 경쟁 시기를 조율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450만을 넘겼다. 연이은 경쟁작으로 1,2주 동안 바짝 벌어야 한다면 <트랜스포머 2>처럼 두 주 동안 1,214, 1,076개의 스크린을 확보하는 과감성도 필요하다.
<해운대>가 한국영화로는 다섯 번째로 1,000만 관객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흥행 2위인 <국가대표>가 한 주 만에 100개가 넘는 스크린을 뺏기며 250만을 넘겼을 뿐인데다가 <지.아이.조>는 같은 배급사에서 배급하고 있기에 스크린 분할과 배정이 탄력적이다. <지.아이.조>와 <해운대>의 개봉에 3주라는 시간차를 두며 제살 깎아먹기는 피했지만, <해운대>의 식지 않는 인기는 오히려 이제 막 개봉하는 <지.아이.조>를 514개의 스크린에 묶으면서 규모를 축소시켰다. 이로서 <해운대>는 뚜렷한 경쟁작이 없는 가운데 꾸준히 스크린 수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물론 <해운대>가 하락세를 보일 경우, <지.아이.조>의 스크린이 늘어나겠지만, 현재로서는 1,000만 고지를 향해 뚝심 있게 밀어붙일 것으로 보인다.
관객의 선택권은 어디서 찾나
매주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수는 대략 56~66편 정도다.(그 중 40~53편의 영화는 한 자리 수 스크린에서 개봉한다) 새로운 영화가 개봉되면 그만큼의 영화들은 극장에서 모습을 감춘다. 하지만 이런 순환 구조에서 특정한 영화가 전체 스크린의 40~50%를 차지하는 것은 일종의 강압이다. 동네에 있는 10개의 스크린 중 절반에서 특정한 영화를 상영한다면, 결국 그 영화를 보라는 무언의 압력이 아닌가. 물론 모든 영화가 동등한 위치에서 관객과 만날 수 없는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산업으로서의 영화는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경제적인 이유로 작은 영화에게 작은 수익을 낼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대작 영화가 큰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 전체 산업이나 시장에서 볼 때 합리적이라 해도,(또 그러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서 영화를 찍는 것이고) 관객의 선택이 우선이 아닌, 스크린 수를 먼저 확보해서 관객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어쩔 수 없이 영화를 선택하는 상황이 생긴다는 얘기다.
실례로, 다양한 아트플러스 극장이 있는 서울을 제외한 지방의 척박한 문화 환경에서는 그 선택의 폭이 심각하게 협소하다. 개봉이 안 되는 영화도 부지기수인데다가 개봉을 한다 해도 배급사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몇 편의 영화가 스크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심할 경우 70%에 가까운 수로 지방 극장의 스크린을 점유하기도 한다. 지방의 관객들은, 원하는 영화는 커녕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 자체가 제한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월~7월 누계 전국 관객수는 전년 동기에 비해 1.7%가 증가했다.(반면 서울은 1.1% 감소했다) 선택권의 폭이 좁은 이들의 수가 더 늘어날수록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배급망에 의해 흥행이 좌지우지되는 경향은 더욱 커진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던 환경 탓도 크다. 전 세계를 상대로 이윤을 남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지난 시간 동안 우리나라의 스크린을 초토화시켜왔다.(그나마 스크린쿼터로 버텨냈다) 할리우드 영화가 재미있어서 봤다는 이들도 많지만, 다른 영화와 비교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배급망을 통해 컨트롤된 영화들을 일방적으로 주입해 왔는지도 모른다.
모든 영화를 다 보고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흥행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 이유로 많은 수의 스크린을 확보한 영화들은 계속 많은 관객을 모으게 된다. 영화에 치명적인 소문이 나지 않는 이상, 스크린 확보는 흥행대작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게다가 방학을 끼고 있는 여름 시즌엔 주말과 평일의 차이가 별로 없기에, 배급사의 영향력은 영화의 생명줄을 쥐고 흔드는 수준이다. 물론 관객도 함께 쥐고 흔들리며 원하는 영화와 상관없이 많이 하는 영화를 봐야 한다. 무슨 영화를 보고 싶어 하든, 멀티플렉스에는 몇 개의 영화만으로 도배질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들은 ‘흥행작’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