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실종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아이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 여인의 소망은 더럽혀진 천사들의 도시에서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시대인 탓이다. 세계대전의 승리를 발판삼아 국가 성장을 눈부시게 이뤄내던 시대, 성장의 그늘이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사회가 병들어가던 시대, 때문에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을 척결해야했던 시대, 재판 없이 범죄자를 처형할 수 있었던 시대, 그러나 개인의 안녕과 인간의 존엄보다 공권력의 체면과 권위 유지가 우선시 되던 시대를 배경삼은,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체인질링>은 이렇게 시작된다.
<체인질링>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미국인의 꿈과 정서를 오롯이 품은, 팔순을 바라보는 노감독의 거칠고 남성성 가득했던 옛 시절과 작별을 고하는 영화가 될 운명이었다. 황량한 사막에서 질겅질겅 담배를 씹던 건맨이 뿜어낸 총구의 열기가 라스베이거스의 사각 링과 병상에서 인간적 슬픔으로 식혀지기까지 꼬박 40년이 걸린 셈이다. 이는 영화 속 프랭키가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를 동경하듯 앞으로 펼쳐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세계 역시 귀향과 가족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동안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이 만들어졌고 <체인질링>으로 이야기는 이어져왔다. 물론 <그랜 토리노>도 머지않아 나와 당신 앞에 도착할 것이다.
1929년 LA에서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체인질링>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주인공과 그의 조력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넘어야 할 부패한 거대집단과의 외로운 투쟁을 통해 당대 미국사회의 가치관과 도덕성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사회와 제도가 외면한 개인의 삶의 무게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한 아이의 실종으로 시작된 지엽적 사건이 국가조직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될 때 상상할 수 없는 참극으로 확대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금주령시대의 끝자락을 움켜쥔 관료집단의 도덕불감증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이처럼 진실의 호도와 왜곡은 국가권력에 의해 어느 사회에서건 끊임없이 자행되어 왔다. 때문에 많은 이들의 리뷰에 드러나듯이 이 영화를 오늘의 한국사회와 병치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장르적 측면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체인질링>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살아온 영화인생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말하자면 서부극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것이다. 거장의 범작이다, 혹은 여전한 걸작이다, 의견이 분분한 영화 <체인질링>에서 정말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금주령시대의 더러운 사회적 기운을 누르는 웨스턴무비의 정조(情操)가 그것이다.
서부극은 가족과 집단의 평화와 안녕을 보장함과 동시에 야만에서 문명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통해 미국의 국가정체성의 발전적 단계를 보여주는 특별한 장르이다. 그러니까 개인의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하고 문명화된 사회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정신을 찬미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통 서부극은 언제나 무법천지가 평정되어 평온을 되찾고 여자와 아이들이 맘껏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며 닫혔던 상점과 술집과 교회의 문이 다시 열리는 것으로 마무리 되곤 했다.
<체인질링>에서 크리스틴은 아들에게 “먼저 싸움을 걸진 말되, 마무리는 네가 해라”고 말한다. 의심할 바 없는 웨스턴무비의 영웅들이 품어왔던 정신이다. 그녀 역시 세상을 바꾸거나 구조적 모순의 개선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사역 따위는 관심 없어요.” 오직 아들만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소망을 도덕과 윤리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1920년대 미국사회를 관통하는 사회적공기가 가득 담겨있을지언정 부패한 공권력을 고발하고 연쇄살인마를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공을 들인 게 아니라는 말이다.
부패한 공권력의 무관심과 음모로 인해 한 여인의 간절한 소망과 어린 아이의 생명이 무참히 짓밟혀지려는 순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웨스턴의 영웅을 등장시킨다. 다름 아닌 와인빌 노스콧 목장에 도착해 삽을 들고 암매장 현장으로 걸어가는 형사 ‘레스터 이바라’와 동료가 그들이다. 비록 망토와 카우보이모자가 중절모와 양복으로 바뀌었을지언정 그들은 웨스턴무비 속 보안관에 다름 아니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던 희귀한 순간을 경험했다. 주저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수 있도록 만든 이 장면! 사실에 기초한 탓에 미학적 측면이 도외시되었다고 주장한 일부 평자들에게 이 시퀀스에 집중해 다시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서부극의 끝자락을 잡고 달려온 이가 아니면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건조하고 긴장감 넘치는 미장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흙먼지 날리며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목표점을 향해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잡은 카메라 속에, 팔순의 거장은 흔적조차 살피기 힘든 웨스턴무비의 정조를 이렇게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세르지오 레오네는 “존 포드 영화의 인물들은 영화 마지막, 문을 열고 나와 노을 진 석양을 바라보며 내일의 희망을 꿈꾸지만, 내 영화 속 인물들은 창문을 열기라도 하면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같은 레오네의 영화적 토양에서 길러진 탓인지 몰라도 미국사회를 바라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각 역시 비감한 회고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체인질링>에 이르러 그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꿈의 실현과정보다는 무너져 내린 꿈과 순수의 시대를 애도하는 데 더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면, <체인질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책임감’ 부재의 시대에서도 ‘희망’을 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주지하다시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스파게티웨스턴의 히어로로 등장해 정통 서부극을 소멸을 지켜본 장본인이다. 하지만 회귀본능은 장소와 역할이 변경된다고 쉽사리 사라지는 것이 아닐 터. 이후의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역할 또한 방황하는 고독한 안티히어로라는 점에서는 망초를 두르고 궐련을 질겅이던 시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용서받지 못한 자>가 서부극을 향한 혼신의 노력이 담긴 심폐소생술이었다면 <체인질링>는 서부개척시대의 공동규범, 즉 여성과 아이를 존중하고 우선시 여기던 서부극의 정신을 1920년대에 투사하여 21세기로 길어 올린 의심할 바 없는 걸작이다. 괜히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거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2009년 2월 5일 목요일 |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