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젊은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될 여든 노인네의 걸작 <체인질링>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 박정환 객원기자 이메일


‘체인질링’(Changeling)이라는 용어는 영미문화권에서 요정이 예쁜 아기를 빼앗아가는 대신에 놓아둔 못난이 아기라는 섬뜩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를 보노라면 영화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저절로 수긍이 간다.

1928년 3월, L.A에 거주하는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는 퇴근 후 집에 있어야 할 아들 월터가 실종되는 사건을 겪는다.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그들 역시 잃어버린 아들을 찾지 못한다. 5달 후 경찰에서 아들을 찾았다는 연락이 오고, 반가운 마음에 아들과 상봉하지만 그 아이는 월터가 아닌 다른 아이였다. 하나 LAPD 반장 JJ 존스(제프리 도노반)는 실수를 인정하기 보다는, 실종된 아이를 몇 달 만에 찾아낸 자신들의 노고가 다른 아이를 인도해 주었다는 잘못으로 퇴색되지 않기 위해 크리스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뿐더러 그 아이가 친아들이 맞다고 집요하게 합리화한다. 이를 알게 된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의 도움을 받아 기자들에게 불합리한 사실을 알리려는 크리스틴을 입막음하고자 존스 반장은 비열한 방법을 택하는데..

L.A Times에서 전직 기자였던 J. 마이클 스트랙진스키가 1년 동안의 자료 조사를 거쳐 11일 동안 집필한 스토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단번에 연출을 결정하기로 마음먹게 만든 실화다. 크리스틴의 모성애에 포커스를 맞추긴 하지만 영화는 관객의 연민을 자아내는 파토스(Pathos)적 요소에만 주력하는 간단한 플롯의 영화가 아니다. 기본 골격이 이 요소에만 집중되었다면 신파 하나로 만족했어야 할 영화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이 영화는 모성애와는 별개로, 권력의 부조리 파헤치기와 공권력과 인권의 충돌, 한 개인의 인권 수호 그와 더불어 스포일러가 될까 차마 서술하지 못하는 다른 요소들이 응집됨으로 하모니를 이루는 영화의 골격들은, 기존의 연출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처럼 감정선의 극대화를 꾀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연출 방식과 조우하면서 응축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게 구축된 시너지 효과는 영화 가운데서 모성애를 통한 신파 추구라는, 하나의 단일화된 맥락만 부여잡지 않고 부조리 전복의 쾌감 등, 다양하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총체적으로 함의한다. 영화 속 다양한 이야기들은 복합적이면서도 영화 속에서 이질화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총체적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이들 이야기가 감정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심장 속까지 파고드는 사유를 가능케 해준다. 영화는 이야기들이 영혼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주는 강렬한 힘이 영상 언어로 제시된다.

월터 대신 다른 남아를 크리스틴에게 인도해 주었다는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상황을 호도함으로 크리스틴을 편집증, 피해망상증 환자로 몰아가는 존스 반장의 후안무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이끌어냄과 더불어 우리 근현대사에서 인권 유린의 대명사 중 하나인 공안 수사와 오버랩되는 씁쓸함마저 자아낸다.

아들을 찾고자 하는 크리스틴의 애달픈 모성애는 자신들의 실수를 감추기에 급급한 LAPD의 횡포로 말미암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케 된다. 하나 크리스틴은 외부와의 연락이 전혀 닫지 못하는 곳에서 원장의 집요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곳을 평생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크리스틴이 처한 위기 상황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에서 맥머피(잭 니콜슨)가 처한 불합리한 상황과 인권 박탈, 더불어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의 쥬세페(피트 포스틀스웨이트)가 험악한 상황에서도 잃지 않은 꿋꿋한 절개를 영화 속 크리스틴의 태도와 매치시킨다면 관객들은 보다 이해가 편할 것이다. 모성애와는 별개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다가 전기치료실로 끌려가는 크리스틴을 보노라면 인권이 참혹하게 유린되던 당시 그곳에서 불굴의 정신이 무엇인지 새삼 반추하게 만든다.

브리그랩 목사를 위시하여 언론의 저력이 아니었더라면 크리스틴의 아들을 향한, 인권 회복을 위한 목소리는 <레인메이커>(1997) 속에서 제시되는 극단적으로 난처한 상황과 매한가지로, 치열하고 힘든 싸움을 홀로 하되 결실을 거두기에는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다. 크리스틴이 위기를 맞는 순간마다 브리그랩 목사가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는 설정이 다소 작위적인 연출이긴 하지만 브리그랩 목사는 곪아터질대로 곪아터진 당시 LA의 공권력과 사법시스템을 감시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정의의 수호자 역할을 탁월하게 해낸다. 이는 또한 영화 속에서 부조리 고발을 통한 부패한 시스템 전복이라는 쾌감의 요소를 가져오게 만드는 촉매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론의 힘을 빌게 된 크리스틴이 영화 속에서 속한 사회 입지적 요건은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구조화를 통해 조망 가능하다. 크리스틴이 아웃사이더이기에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지 그녀가 LA라는 시스템 내부의 인사이더였다면 시장과 반장처럼 그 시스템을 견고화하고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데에 주력했을 것이다. 앞에서 상술된 언론의 저력은 아웃사이더라는 크리스틴의 입지조건과 더불어 고려되어야 한다.

이창동 감독 <밀양>의 모태가 된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와 일정 부분 오버랩되는 후반 시퀀스에서 크리스틴은 불같은 분노를 스크린으로 강렬하게 내뿜는다. 크리스틴은 아직 찾지 못한 아들의 행방을 좇기 위해 ‘그’(별도로 일반시사회를 갖지 않은 터라 스포일러가 되기에 누구라고 밝힐 수 없어서 대명사로 설정함. 기자 주)에게 물어보지만 그는 크리스틴에게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그와 크리스틴과는 별개의 타자인 ‘제3자’(이것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은유적 화법이다. 기자 주)에게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하니, 용서 받아야 할 주체가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상황, 즉 주객이 전도되어도 상당히 전도된 셈이다.

영화는, 누가 보더라도 엄연히 가해자인 그가 과연 크리스틴보다 앞서 제3자에게 먼저 용서를 받을 정당한 권리가 있는지, 용서라는 수혜를 받을 권리와 우선순위는 과연 제3자에게만 있고 피해자는 용서라는 부분에 있어 우선순위에서 소외당해도 좋은가에 관해 치밀한 영상 고발로 제기한다. 제3자 앞에서 크리스틴과 월터의 존엄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궁극적인 초월성 앞에서 과연 이대로 훼손 당해도 좋은지, 어떤 가치를 부여받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관한, 신랄한 영상 질문이다.

<체인질링>은 2시 20분이라는 러닝타임으로 인해 관객들에게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는 영화지만, 칸느영화제에서 프랑스 평론가들의 찬사가 절로 수긍될 만큼 뛰어난 영화임이 분명하다. 자칫 신파로 흐르기 쉬운 실화를,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복합적인 내러티브로 구현해내는 솜씨가 젊은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탁월하기에 그렇다.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

15 )
eunsung718
잘 보고가요ㅋㅋ   
2010-09-08 14:20
kisemo
잘 읽었습니다 ^^   
2010-04-13 16:27
taijilej
좋은 영화   
2009-02-17 17:52
gt0110
걸작...   
2009-02-14 18:11
mckkw
2시간 20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   
2009-02-07 13:47
shj1989
진짜 걸작 중 걸작   
2009-02-02 10:32
podosodaz
보고 싶네요~   
2009-01-31 12:21
kwyok11
뛰어난 영화~~   
2009-01-31 07:15
1 | 2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