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 , 얼굴이 시린 만큼이나 옆구리도 시리다 . 연말까지 수첩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술자리 약속과 송년회로 잠시 잊을 수도 있지만 , 근본적으로 외로움은 치유되지 않는다 . 게다가 솔로라는 조건까지 갖추고 있다면 , 술 한 잔 없이 지낼 수 있는 성탄 전야가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울 수도 있겠다 . 더구나 , 휴일을 얼마 앞두지 않아 헤어진 커플이라면 어떠할까 .
성탄절 별난 사고가 많기로 유명한 헐리웃인지라 잘 지내던 커플이 헤어졌다거나 , 짝사랑하던 남자가 약혼을 한 일 따위는 쥐꼬리만한 흥미거리가 되지 못할 수도 있겠다 . 적어도 일본 재벌 소유의 하이테크 빌딩에서 중무장한 테러리스트가 인질극을 벌이거나 , 전쟁 무기를 개발하다 미쳐버린 재벌이 초록색 괴물 옷을 맞춰 입고 날아다니는 보드 정도는 타고 다녀야 겨우 사람들의 주목을 끌는지 모른다 . 그러나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면 조회수도 올라가지 않는 이 순간에도 한 구석에서는 성탄 전야 가족 여행에서 홀로 남겨진 꼬마가 도둑들과 싸우고 있고 ,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한 여자에게 반해 스케치북에 열심히 스크랩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으며 , 실연을 잊기 위해 성탄절에 집에도 있기 싫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
연인과 함께 보내기 좋은 꿈결 같은 연휴를 앞두고 한 여자는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운 것을 알게 되어 헤어지고 , 다른 한 여자는 좋아하던 남자가 약혼한 사실을 알게 되어 속이 상했다 . 비슷한 시기에 두 여자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한동안 꼴 보기도 싫은 주변을 떠나 연휴 동안 전혀 다른 곳에서 지내는 것 . 그리고 우연하게도 , 채팅을 통해 두 여자는 만나게 된다 . 한 사람은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아만다 ( 카메론 디아즈 ) 이고 , 다른 한 사람은 런던에 살고 있는 아이리스 ( 케이트 윈슬릿 ) 니 직접 만날 리는 없지만 채팅창에서 둘은 곧 의기투합한다 . 서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들어 맞았던 것 .
흥미진진한 오프닝이다 . 올 성탄절에 영화관에 걸려있을 로맨틱 코미디 〈로맨틱 홀리데이〉 .
폐부를 찌르는 철학적 메시지나 절묘한 풍자나 서늘한 현실 감각을 얻지는 못할지라도 서두가 얼마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끌고 갈지 기대가 되는 오프닝 . 좋은 오프닝이 있다면 이미 재미있는 이야기의 반은 얻은 셈이다 . 흥미진진한 초반 상황을 던져주면 , 상황의 탄력 만으로 이야기의 반은 성큼 흘러가는 것이 코미디니까 .
두근두근 로맨틱 코미디의 상황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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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부터 살펴 보아도 그렇다 .
못 가진 것 없는 공주가 즉위식을 가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치자 . 로마에 들렀다가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슬쩍 일탈을 감행 , 도망을 쳤다 치자 . 때마침 특종을 찾아 헤매던 기자를 만났다 치면 ? 모두가 알고 있는 로맨틱코미디 고전 〈로마의 휴일〉이 되는 식이다 .
꼭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어도 좋다 . 배우의 개인기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상황 코미디가 여러 사람의 기억에 남았다면 , 보통 듣기만 해도 귀여운 상황을 초반에 던져 주었을 테니까 . 실제라면 ( 천년 묵은 외계인이 지하에서 기지개를 펴거나 유람 갔던 슈퍼맨이 지구로 돌아오는 일처럼 거의 벌어지지 않을 것 같지는 않더라도 ) 여간해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도 어쩌다 한 번 벌어지는 코미디의 세계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밖에 .
쌍둥이 아이들은 아주 드물지 않다 . 이혼한 부부도 그리 드문 존재가 아니다 . 그런데 두 가지 경우가 합쳐졌다면 ? 게다가 여름캠프에서 만난 쌍둥이 아이들이 자신의 부모들을 다시 합치려는 귀여운 계획을 세웠다면 ? 딱 들어맞는 디즈니 가족영화의 오프닝 되겠다 .
멀리 떨어져 있는 동병상련 두 여인이 의기투합하기 이전에 , 감독 낸시 마이어스는 1998 년 디즈니 영화 〈패어런트 트랩〉으로 데뷔한다 . 멀리 떨어져 있던 쌍둥이의 귀여운 의기투합 , 흥미로운 구석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법이다 .
각색에도 참여한 〈패어런트 트랩〉은 사실 〈에밀〉시리즈로 유명한 독일 동화작가의 원작 . 영화만 해도 1961 년에 이미 디즈니에서 제작한 바 있는 , 이른바 리메이크인 셈이다 . 하지만 낸시 마이어스의 이력은 그보다 전에 시나리오 작가로 시작했다 . 에드워드 스트리터의 인기 소설을 각색한 〈신부의 아버지 〉는 1950 년에 빈센트 미넬리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 졌는데 , 아버지 스탠리 뱅크스 ( 스펜서 트레이시 ) 가 예쁜 딸 케이 뱅크스 ( 엘리자베스 테일러 ) 를 시집 보내며 벌어지는 소동을 엮은 코미디의 고전 . 이후 결혼식장의 소동을 다룬 수많은 코미디 영화에 영향을 준 이 작품의 상황 설정이 〈미트 패어런츠〉나 〈퍼펙트 웨딩〉같은 최근 영화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 하지만 50 년대 장르 영화 황금기 시절을 대표하는 감독 빈센트 미넬리의 작품보다 현대 관객들에게는 1991 년에 리메이크 된 〈신부의 아버지 〉가 더 익숙할 듯 싶다 . 아버지 스탠리 뱅크스 역을 스티브 마틴이 맡은 리메이크 〈신부의 아버지 〉는 흥행 성공으로 속편 〈신부의 아버지 Ⅱ〉가 1995 년에 개봉했다 .
이 두 편의 〈신부의 아버지 〉시리즈에 낸시 마이어스는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했다 . 시리즈 사이인 1992 년에는 이탈리아 코미디 영화를 헐리웃에서 리메이크한 〈강아지를 타고 온 건달들〉에도 참여했으니 코미디 영화 리메이크 시나리오 작업으로 잔뼈가 굵은 셈이다 .
수작 코미디 고전을 각색하며 단련한 솜씨는 닉 놀테와 줄리아 로버츠가 특종을 따내기 위해 경쟁하는 기자로 출연하는 <아이 러브 트러블〉을 거쳐 첫 감독 작품 〈패어런트 트랩〉에 이르게 된다 . 다양한 성격의 코미디 영화를 거친 경험이 경쾌한 상황을 재주 좋게 제시하는 시나리오 능력으로 발전했음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
생동감 있는 캐릭터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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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 나쁘지 않은 데뷔작으로 입봉한 감독 낸시 마이어스를 성공으로 이끈 영화의 시나리오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 그러나 매우 마초한 남자가 어느 날 여자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다는 〈왓 위민 원트〉의 상황은 낸시 마이어스가 소화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재였고 , 이 영화의 성공으로 낸시 마이어스는 유명세를 타게 된다 . 그러고 곧 , 〈왓 위민 원트〉의 성공을 이어 받아 2003 년 개봉한 낸시 마이어스의 차기작은 자신이 시나리오까지 직접 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이 되었다 . 역시 20 대 미녀들만 노리는 영계 킬러 매력 중년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가 영계의 어머니와 맺어진다는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 상황으로 시작하는 영화 .
영화의 처음은 공들여 구축한 흥미로운 상황이 끌고 간다고 할 지라도 , 오프닝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좋은 처음이 없더라도 훌륭한 코미디 영화로 발전하는 경우는 무척 흔하고 , 여기에 흥미진진 코미디 영화의 또 다른 한 축 , 캐릭터가 있다 .
소설가 은 희경 이 소설 쓰는 요령에서 밝혔다시피 ‘ 처음에 구축해 놓은 캐릭터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놓아 두면 만들어 지는 것이 이야기 ' 라고 하면 , 생동감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면 즐거운 코미디 영화가 만들어 질 터이다 .
낸시 마이어스가 감독으로 참여한 작품은 〈로맨틱 홀리데이〉까지 단 네 작품에 불과하지만 ( 차기작이 기획에 들어가 있으므로 총 다섯 편 ) 최소한 로맨틱 코미디에 있어서는 상황과 캐릭터를 절묘하게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 비슷한 또래이며 역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그녀는 요술쟁이〉에 시나리오 작가로 , 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그녀는 요술쟁이〉는 직접 감독까지 한 노라 애프런과 함께 낸시 마이어스는 2000 년대 헐리웃 로맨틱 코미디를 대표하는 작가에 속한다 . 이제 필모그래피에 약간의 무게감만 더해진다면 과거의 명장 빌리 와일더나 빈센트 미넬리 정도의 이름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흥미로운 캐릭터는 대조적인 부분에서 서로 부딪치며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 로맨틱 코미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만남과 마찰을 통해 연애감정을 키워가는 과정일 터인데 , 생동감 있는 캐릭터를 함께 놓아두면 둘은 부딪치고 화해하며 사랑을 키워 나간다 . 절묘한 초반 상황보다는 대립하며 친해지는 캐릭터를 배치한 〈아이 러브 트러블〉이 그렇다 .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이 한 가지 사건을 놓고 경쟁하는 기자라는 사실은 , 두 기자가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흥미로운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
남성적인 매력만큼이나 자신감이 넘치던 광고기획자 닉은 어떤가 . 최신 광고 시장에 대해 감각을 잃어가면서 밀려나기 시작한 닉은 어느날 여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 그의 라이벌로 나타난 다시는 섬세하며 영감이 넘치는 닉과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여자 . 그녀의 생각을 먼저 읽은 닉은 승승장구를 계속하지만 , 원래 성품이 정반대인 닉은 내부적으로 부딪치고 다시를 사랑하게 된다 . 절묘한 상황으로 시작한 〈왓 위민 원트〉를 이끄는 것은 역시 , 주고받으며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닉과 다시의 관계다 .
영계 킬러이자 잘 나가는 음반사 사장인 해리도 마찬가지다 . 해리에게 반한 20 대 미녀만 계속 나왔다면 영화는 성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나이를 이기지 못한 해리가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자신이랑 사귀었던 마린의 어머니 에리카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며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은 흥미로운 연애담으로 발전한다 . 게다가 줄 곳 조용한 환경에서 희곡을 써온 에리카와 화려한 생활을 계속한 해리는 보면 볼수록 닮은 구석이 없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
업계 경력 30년,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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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데뷔작 〈벤자민 일병〉부터 남편 찰스 샤이어와 함께 영화계에서 작업한 기간이 무려 30 년이 되어가는 낸시 마이어스는 줄 곳 코미디를 해 왔다 . 작자적 역량과 관계없이 한 업계에서 30 년 가까이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란 일정 이상의 존경을 얻기 마련이다 . 작가적 명성으로 유명 스타들을 얼마든지 불러 모을 수 있는 ( 고인이 된 ) 스탠리 큐브릭 , 로버트 알트먼이나 ( 아직 팔팔한 ) 스티븐 소더버그 , 쿠엔틴 타란티노와는 다르게 주류 업계에서 꾸준히 일 해온 낸시 마이어스는 유능하고 유명한 배우들을 기용할 수 있었다 .
잘 쓴 상황과 잘 만든 캐릭터에 배역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배우가 있다면 , 로맨틱 코미디를 만드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 시나리오로 참여했던 〈신부의 아버지 〉에서 스티브 마틴은 원작에서 같은 역할을 맡았던 스펜서 트레이시를 90 년대식 코미디로 재해석했다 . 열정과 지략을 함께 갖춘 기자 두 사람이 필요했던 〈아이 러브 트러블〉에서 남녀 기자를 맡았던 배우는 닉 놀테와 줄리아 로버츠였다 .
통상 데뷔작은 초짜 감독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 감독 데뷔작 〈패어런트 트랩〉에서 귀여운 쌍둥이 역을 맡은 어린시절의 린제이 로한은 적역이라는 감탄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 출세작 〈왓 위민 원트〉는 어떨까 .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마초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가 여성의 마음을 읽고 어쩔 줄 모르는 귀여운 남자를 맡은 배우는 멜 깁슨 . 능력이 출중하지만 섬세한 마음을 가진 상대역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헬렌 헌트였다 . 각본과 감독 모두에서 역량을 발휘한 낸시 마이어스의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주역을 맡고 있는 영계 킬러 중년 남자는 ? 능글능글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잭 니콜슨이 딱이다 . 나이가 들어서도 그를 압도할 만큼 매력적인 여자라면 , 과거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지적인 뉴요커를 대표했던 다이앤 키튼만한 배우가 없겠지 . 게다가 다이앤 키튼이 맡은 에리카는 〈파고〉에서 근성있는 여경찰을 연기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보좌하고 있고 , 심지어 에리카의 희곡에 반한 젊은 의사 키애누 리브스가 작업을 걸어오기까지 한다 .
성탄절을 홀로 보내게 된 운 나쁜 여인들은 어때 ? 런던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서로 집을 바꾸기로 한 두 여자는 오드리 헵번 ? 멕 라이언에 이어 헐리웃 로맨틱 코미디를 이어받은 카메론 디아즈와 케이트 윈슬릿이다 . 게다가 쓸만한 남자 하나 없다는 두 사람의 대답과는 다르게 , 로스엔젤레스에는 재치있고 배려심 많은 잭 블랙이 있었고 , 런던에는 매력적이고 달콤한 주드 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
선남선녀들이 평범한 체 불행한 체 연애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즐겨주는 재미가 로맨틱 코미디다. 때 마침 올 성탄에는 로맨틱 코미디에 일가견이 있는 낸시 마이어스가 카메론 디아즈 ? 케이트 윈슬릿 ? 주드 로 ? 잭 블랙의 화려한 진용을 이끌고 〈로맨틱 홀리데이〉로 돌아온다. 원하는 만큼의 판타지와 연애담을 즐기기에 이만한 선물도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