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에서 말한 ‘가족영화’의 의미는 할아버지부터 유치원 다니는 손녀까지 ‘온가족이 둘러앉아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런 거라면 명절연휴 때 편성표를 장식하는 성룡의 영화도 가족영화다. <파이터>를 가족영화라 함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는 뜻이다. <파이터>는 실존인물인 미키 워드의 인생에서 그가 2000년 세계챔피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떼어내서 각색했다. 만약 정통적인 복싱영화였다면 오히려 세계챔피언 등극 이후를 다루는 편이 적절했을 것이다. 사실 미키 워드는 천부적인 재능이나 화려한 기량을 지닌 복서는 아니었다. 복서로서 그리 대단한 전적을 남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나더라도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사생결단으로 주먹을 날리는, 투쟁심과 근성을 지닌 그야말로 ‘파이터’였다. 미키 워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경기는 예전 KBS 스포츠 채널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는, 그의 평생의 라이벌 故 아투로 가티와의 3연전이다. 특히 2002년 펼쳐졌던 1차전은 지금도 세기의 명승부로 회자될 만큼 복싱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라. 어떤 복싱영화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의 전율스러운 시합이다.)
<파이터>가 미키 워드의 전성기 시절을 제쳐놓고 굳이 챔피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이유는, 미키보다는 그와 가족들 ― 특히 어머니와 형과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복서’ 미키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오히려 가족들 뒤에 한 발 물러서 있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남녀조연상을 휩쓴 것은 어머니 역의 멜리사 레오, 형 역의 크리스찬 베일이었다는 점은 애초 시나리오에서부터 그들의 비중이 컸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 괜찮은 복서가 될 수 있었던 미키의 앞날을 방해한 것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가족들이었다. 미키는 소도시의 가난한 집안에서 2남 7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복서 출신이자 미키의 트레이너인 형은 마약에 찌든 전과자였고, 미키의 매니저였던 어머니는 대전료에 급급해 그에게 불리한 경기를 종용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덫
이쯤에서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다. <길버트 그레이프>다. 길버트의 청춘을 좁고 암담하게 만들어버리는 원인이 그의 가족인 것이다. 남편이 자살한 충격으로 200kg의 비만이 되어 집안에만 틀어박힌 어머니, 무기력한 실업자 누나, 정신지체아 남동생, 반항적인 여동생. 어쩌면 길버트는 실제 조니 뎁처럼 할리우드에 가서 스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발목을 덫처럼 붙잡고 있는 가족들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덫을 부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발목을 끊어내기도 어렵다. ‘하나뿐인 가족’이라는 짐은 그만큼 무겁다. 그리고 라세 할스트롬 감독은 이 가족들에게 끝내 100%의 행복을 안겨주지 않는다. 그 대신 길버트에게는 예상치 못한 행복을 안겨준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다음, 남동생 어니를 데리고 길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날아갈 듯이 가벼우며,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희망적이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가족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노력하기 시작한 시점에 찾아온 비극으로 인해 자유로워졌다. 아이러니하다.
풀리지 않는 딜레마, 가족의 양면성
이런 양면성은 가족이라는 집단에 소속된 모든 이들이 풀어야 하는, 그러나 풀지 못하는 딜레마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이름일까.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그 자체로 언제나 사랑과 평화와 상호이해를 전제하는가.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산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에서 가족들과 소원해진 완고한 노인으로 나왔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듯 보인다. 영화에서 그는 끝끝내 가족들과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새롭게 관계 맺은 이들은 피가 섞인 가족 이상의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그가 매기에게 알려준 ‘모쿠슈라(Mokulsha)’의 뜻은 ‘my family’가 아닌 ‘my darling, my blood’였다.
<파이터>에서 가족 사이의 잠재적인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든 장본인은 미키의 연인 샬린이다. 복서인 남자친구 만큼이나 깡다구 좋은 그녀는 그동안 미키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구구절절 끄집어내어, 어머니와 형에게 거침없이 쏘아붙인다. 그것은 미키가 사람 좋은 바보라서 말하지 못했던 게 아니다. 단지 샬린이 가족구성원이 아닌 타인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뿐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미키는 언제까지고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묵묵히 견디다가 주저앉고 말았을지 모를 일이다. 샬린보다도 멀리 떨어진 바깥에서 제3자로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어머니와 형의 철없는 진상을 보고 혀를 끌끌 차고, 미키의 답답함에 속이 터지고, 샬린의 대변에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미키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짠한 무언가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2011년 3월 9일 수요일 | 글_최승우 월간 PAPER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