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의 죽음보다 지구의 종말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인 예지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엔 집단일치성이론을 들 수 있다. 개인의 죽음은 말 그대로 혼자서만 죽는 것이다. 죽음 자체는 슬프거나 위로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외롭다. 자기만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신이 죽는 다는 사실에 대해 지구에 존재하는 몇 명 정도나 지극히 슬퍼할까를 생각하면 쓸씀함마저 든다. 그게 싫은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종말을 앞두고 모두 같이 죽는 다는 건, 그만큼 함께 죽음에 대해 공감을 할 상대가 많아진다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위로할 계기가 되며, 보다 덜 외롭다고 느낀다. 나만 죽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기왕에 죽을 거면 다 같이 죽자는 심리다. 그것도 혼자 질병에 의해 고통받다 죽는 게 아니라 외부의 거대한 충격, 딥임팩트 같은 것들이라면 보다 마음 편히 가질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운이 좋아 혼자 살아남을 지도 모른다는 영화 같은 상상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멋진 이성이 하나 정도 살아서 다시 인류의 씨를 퍼트릴 수 있다면 더욱 좋겠고.
만화를 너무 많이 보았거나 특정 종교에 너무 심취한 결과 인지도 모른다. 우습다. 예전 어느 도시에 인구가 너무 많아 다 함께 살 수 없으니 절반 정도는 죽어줘야 한다는 정책이 나왔다. 그러면 누가 죽어야 하는지 물었다. 주민번호 특정 번호에 해당하는 사람만 살리자 라는 주장이 나오자 서로들 눈치만 보았다. 절반이라는 확률, 죽을 수도 살 수 있는 딱 절반의 확률에서 사람들은 갈등했고 갑론을박끝에 모두 없던 일로 해버렸다. 산다는 건 절박하지만 자기앞에 닥친 죽음은 그 누구도 감내하려들지 않는다.
근 세기들어 전에 없던 질병들이 빈번하게 창궐하기 시작했다. 사스, 조류독감, 구제역, 신종플루등등, 그 외에 질병의 시작점을 추정하기 어려운 질병은 인류를 위협해왔다. 이를 두고 과학자들은 인간에게 의해 죽음을 당하는 동물들의 역습이라고까지 말했다. 정말 그런걸까? 영화 인류멸망보고서는 섬찟하다. 3편의 에피소드 내내 막연하게 품고 있던 지구의 멸망이라는 화두에 보다 구체적이고 실현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 에피소드에선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여지는 남겨두었지만 애처롭다. 혼자 살아남아서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얼마간의 연명으로만 보였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관념을 능가하는 로봇이 등장했다면 인간들은 그 로봇을 두려워하여 제거해야할 존재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로봇은 도리어 그런 인간에게 깨달음을 전한다. 피와 살과 뼈로 된 인간의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두뇌의 작용으로 발산되는 사유다. 그런데 볼트와 너트, 그리고 에너지로 움직이는 로봇에게 보통 인간이 생각지 못하는 洞察과 正覺의 깨달음이 술술 흘러나올때 그걸 만든 자에겐 어떤 느낌이 전해질까
바이러스, 로봇, 당구공이 가져온 나비효과로 소재를 삼았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이 야기를 완성시켜야 할 목적어가 된다. 그럼 그 목적어를 서술하는 주어는 과연 누구인가. 신은 없다. 비가 내린다가 아니라 비를 내리게 한다고 말할 때 그 주어는 누구란 말인가. 없는 존재에 과도한 미련은 집착이다. 다가올 인류 멸망의 시간동안 그 해답을 찾다보면 시간은 다 갈지도 모른다.
세 편의 에피소드는 첫 번째와 세 번째를 임필성 감독이, 두 번째를 김지운 감독이 연출했다. 그런 이유로 확연하게 다른 질감이다. 그런데 굳이 세 편을 하나의 기분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묵시록적인 주제가 관통하지만 옴니버스 영화라고 인식하고 대하면 잠시 쉴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좋다. 처음부터 편하게 봐도 되지만 촌철살인의 유머와 생각지 못한 배우들의 등장과 애드립이 무거운 주제를 쉽게 접하게 만든다. 거기에 쉬지 않고 흔들어 대는 듯한, 사회 암적인 존재에 대한 꼬집음이 웃음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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