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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하던 신부, 상현은 수혈을 잘못받아 뱀파이어가 된다. 타자의 생명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 누군가의 피를 필요로 하게 되는, 극단적으로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적 욕망까지 덧붙여진다. 한 편으로는 신념과 그에 따른 의무를 따르고자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금기로 여기던 쾌락을 좇으려는 상현의 복잡한 심리를 중심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상현은 이런 골치아프다 못해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교적 자신의 욕구를 잘 절제한다. 살기 위해 피를 구하긴 하지만 절대 자신이 마실 피를 위해 살인을 하지는 않는다. 그가 흔들린 것은 성적 욕망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은 사랑이라는 고상한 이유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긴 하다. 태주가 고통스런 지옥에서 살고 있다고 여겨, 그녀를 탈출시키고자 하는 애정 어린 마음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태주에게 그가 빠져든 것은 사실 성적 욕망이 아니었던가. 그는 그녀를 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녀를 통해 성적 쾌락을 맛본 후 급속도로 사랑에 빠졌다. 그가 살인을 하게 된 건, 결국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아니, 그보다는 인간의 욕망은 너무도 강하다. 피를 원하는 것도 생명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같은 건 하기도 훨씬 전에, 목이 마르고 피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피를 마시면 잠깐의 갈증과 고통이 해소되지만 또 다시 원하게 될 테고, 섹스를 하면 잠시 황홀경에 도달할 뿐 또 다시 원하게 될 텐데도 자꾸만 원하는 것이다. 인간은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하게 설계되어 있다. 까짓꺼 원할 때마다 충족시키는 건 어떨까? 태주는 말한다. '우리는 사람 먹는 짐승'이라고. 나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탁월한 감정과 욕구를 조절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진 않는다. 다만 인간은 그런 조절을 하도록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적 규율을 만들었다고 본다. 자연적인 짐승의 무리 안이 아닌, 인간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정과 욕구의 조절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상현은 그런 사회적 규율을 따라야 할까? 상현이 인간인지 짐승인지 따지고 봐야할 문제다. 상현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을 때에는 그런 규율들과 그 안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신념을 최대한 따르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기를 조금씩 포기하면서 그런 규율을 저버린다.
상현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자신은 사람 도우러 간 거고, 자신이 수혈 받을 피를 선택한 것도 아니라고. 또 살인의 목적 또한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고. 그에게는 정말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한 일들 뿐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어쩜 그렇게 격한 시험에 들게 되었던 것인지. (그래서 신을 안 믿겠다는 얘기는 집어치우자;) 실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의 범위는 너무도 좁은 것 같다. 세상에는 내 의지로 선택한 일이 몇 가지나 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은 내 삶의 연속을 이루는 것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잘한 잔 가지들에 불과하고, 그것의 틀을 이루는 커다란 사건들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내 선택의 타이밍이 중요할 텐데, 그건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현이 엠마누엘 연구소에 가고자 한 것은 그의 선택이었지만, 그는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도 아니고 그의 말처럼 수혈 받을 피를 선택한 것도, 뱀파이어를 자처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선택되어진' 일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는 언제나 어렵다.
상현은 자신의 병이 치유된 것을 기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저 심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태주도 죽은 강우의 환영에 시달리는 자신과 상현을 '그저 심리적인 것'이라고 안심시키려 든다. 그러나 '심리적인 것'이라는 말에는 어떤 주술이라도 있는 듯하다. 전자의 상현의 경우에는 그저 심리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해당사항이 없지만, 후자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뭔가 억지로 생각을 바꾸려 들면 안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긍정적이고 싶다고 자꾸만 생각하면 오히려 비관적 성향을 띠기가 쉽듯이, 심리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려고 하면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쉬운 모양이다. 태주와 상현은 병적으로 강우의 환영 때문에 고통받는다. 특히 태주는 정신줄 놓아버린 여자같다. 사람이 뭐든 억지로 하면 안 되는 게지.
어쨌거나 잔인하고 야하고, 딱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스타일이다. (잔인하고 야하다는 것도 장면마다 조금씩 본 게 전부여서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그런 자극적인 요소들로만 이루어진 말초적인 영화는 아니다. 그 자극적인 장면들을 연결 지어주는 고리들도 튼튼하고, 중간중간의 재치있는 장면들도 좋다. 영화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영상, 대사, 짜임새, 스토리 등은 모두 완벽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기본은 언제나 가장 어려운 것이기에 이 영화가 진짜 웰 메이드라고 느껴진다. 게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김옥빈의 연기가 돋보였다. 그녀의 미모는 나를 넋 놓고 설레게 했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에 조그맣고 탐스런 코, 사람 피를 마신 시뻘건 색을 띠어도 예쁜 입술! 게다가 늘씬한 몸매! 이런 외모에 연기를 못하면 말짱 꽝이지만, 연기까지 신들린 듯이 잘해내는 걸 보고 이 여자 정말 배우다 싶더라. 계속 쭉쭉 성장했으면 좋겠다. 응응, 몸매 관리 많이 하신 것 같은 송강호 아져씨도요!
+ 영화를 같이 본 분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물'에 관한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가 내게 얘기해 준 건 영어제목은 'Thirst(갈증)'이라는 점과 뱀파이어가 되는 병의 이름은 '공수(恐水)병'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갈증이 욕망에 대한 갈구, 쾌락에 대한 갈망으로만 생각했는데 물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상현과 태주는 강우를 살해하고 그의 환영에 시달리면서 계속 물에 대한 공포를 동반한다. 마작 모임의 이름도 수(水)요일에 모이니 '오아시스'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연관성이 있는 상징적 요소들을 생각해보니 이거, 시적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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