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치포인트>는 웃음기가 없는 우디 앨런의 소수 작품 중 하나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유머의 자리가 비워지면 거기에는 잉마르 베리만의 그림자가 들어선다. 우디 앨런이 베리만을 존경한다고 말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여러 번이다. 그건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영화적 탐구의 자세를 베리만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우디 앨런은 선배 감독인 베리만의 영향 아래 무작정 놓이지 않기 위해 그 차별성으로 코미디를 선택한다.
“나는 코미디언이고 코믹배우입니다. (내가 만약 그 영화에 출연했더라면) 관객은 나를 보는 순간 웃었을 겁니다.” 그의 첫 번째 진지한 드라마로 기억되는 <인테리어>에 관한 인터뷰에서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이유를 그렇게 말한 적도 있다. 물론 <범죄와 비행>에서는 그런 염려를 떨치고 출연을 감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우디 앨런은 큰 주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작은 역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제한한다. 코미디 안에서는 끊임없이 정신분석의에게 칭얼대고,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입담을 과시하고, 궤변과 억견으로 말의 홍수를 만드는 주인공이지만, 그가 빠지거나 역할이 줄어들면 그의 영화는 대개베리만적 세계에 가 닿는다. <인테리어> <9월> <또다른 여인> <범죄와 비행> 등이 그런 영화다. 우디 앨런의 부재로 보나, 드라마의 양상으로 보나 신작 <매치포인트>도 일단은 여기에 속한다. 죽음에 관한 탐구, 죄로서 신과 내기를 거는 주인공의 선택, 삶의 일부로 들어온 예술양식이 서로 공존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삼류 테니스 선수 크리스(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는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좀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뒤, 상류층의 테니스 교습 강사로 생활고를 해결하며 다른 진로를 모색 중이다. 상류층 2세 톰(매튜 구드)을 알게 되고, 그의 여동생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와 연애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 꿈은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배우 지망생이자 톰의 애인인 노라(스칼렛 요한슨)를 톰의 가족 파티에서 만난 뒤로 크리스는 그녀에게 푹 빠져버린다. 톰의 가족과 함께 별장에 놀러간 크리스는 결국 애인 클로에의 눈을 피해 노라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온 노라가 크리스를 피하자, 크리스는 단념한 채 클로에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결혼생활에 염증을 내고 있던 크리스는 톰과 노라가 헤어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격정적인 애인 사이로 발전한다. 사건은 여기에서 터지는데, 공교롭게도 아기를 갖고 싶다고 소망하던 클로에 대신 노라가 임신 소식을 알린다. 성공가도를 위해 클로에와의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할 것인지, 원초적이고 격정적인 노라와의 사랑을 책임져야 할 것인지, 크리스는 고민에 빠진다. 그는 죄를 선택한다.
별로 뛰어나지 않은 근작들 다음에 온 탓에 질적으로 너무 과대 포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매치포인트>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클로즈업의 빈번한 사용이 눈에 띈다. 크리스와 노라는 꽉 짜인 클로즈업에 자주 담기는데, 사실 우디 앨런은 클로즈업에 무척 신중한 감독이다. 웃음이 없는 영화에서만 클로즈업을 즐겨 쓴다. 스스로도 “드라마적인 영화에서 나는 나 자신이 훨씬 더 클로즈업을 많이 쓰는 것을 본다. 좀더 코믹한 영화에서는 그러니까 그리 무겁지 않은 영화들에서는 클로즈업을 적게 쓰길 좋아한다. 클로즈업들이 그리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영화에서는 다르다. 클로즈업은 어떤 무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라고 <또다른 여인>에 관한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크리스와 노라가 술집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은 우디 앨런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클로즈업 사이즈이며, 그리고 이건 이미 둘 사이의 관계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치포인트>의 마지막 장면이 가족을 뒤로하고 화면의 앞쪽에 서 있는 크리스의 클로즈업이라는 것도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특히 이 영화의 구상 동기에 대한 우디 앨런의 말은 인상적이다. 그는 “살인범이 본래 죽이려 했던 희생자의 옆집에 사는 이웃을 죽여서 자신의 범행을 우연한 것으로 가장하려는 상황”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출발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간교하게 꾀를 내어 죄를 행하는 인간의 모습이 영화의 동기로 가장 먼저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람피우다 곤란에 처한 남자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바람을 피우는 크리스의 행동은 우디 앨런의 전작에서 인물들이 저지른 죄질과 비교해 크게 더할 건 없다. <매치포인트>에서 다른 점이란 경쾌한 이야기의 해결 방법이 뒤로 처지고 뭔가 육중한 느낌의 고전적 결말로 갑작스레 치닫는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꼬여버린 일을 처리하는 크리스의 행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과연 이것이 21세기 세련된 상류층에 속한 인물의 해결 방법으로 적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극단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가 스트린드버그의 희곡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좋아하고, 베르디의 오페라를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건 단순히 그의 교양을 설명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우디 앨런이 베르디, 비제, 도니체티, 고메즈, 로시니의 오페라 아리아를 크리스와 노라의 상황들에 언질을 주는 주석으로 사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크리스가 마치 19세기 예술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매치포인트>에는 운명에 대한 19세기적 주인공의 선택과 그에 따른 웅장함이 있다. 죄와 죽음에 대한 상상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우디 앨런의 말을 귀담아들을 때야말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와 행동과 음악들의 기이한 고전적 제스처가 이해가 간다. <범죄와 비행>이 <매치포인트>와 비교될 수 있다면 그건 단순히 이야기상의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비정한 법칙에 직면하는 태도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고자 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악은 붙잡힐 때만 벌을 받는다. 그는 끔찍한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괜찮다.” <범죄와 비행>의 주인공 주다를 설명하면서 우디 앨런이 한 말인데, 그걸 지금 우디 앨런은 19세기적 제스처로 다시 질문하고 있다. 차이를 두자면 <범죄와 비행>은 포엠에 가깝고, <매치포인트>는 아리아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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