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정말 인상적으로 봤었던 기억이 납니다(6년 전에 개봉했었죠. 그 때 개봉 주에 가족과 함께 보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6·25전쟁이라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서 참혹한 전쟁 속에 있었던 인간적인 모습들을 - 형제애와 가족 - 중심으로 그 비극으로 접근하여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더욱 더 강화시키고, 전쟁 속 영웅이라는 것에 대한 약간의 고찰이 집어넣고(처음 봤을 땐 물론 이런 생각은 안 했죠.), 할리우드에 내놓아도 전혀 꿀릴 것 없는 디테일하고 실제 같은 전쟁 장면도 있었고, 게다가 (감상적이라는 비판이 가해질 수는 있더라도) 결말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정말 감동적이었죠.
그리고 같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포화 속으로>가 개봉했죠. 예고편은 정말 대박이었는데.. 평이 너무나도 안 좋게 나와서 기대감이 증발해버렸고 이걸 극장에서 안 보고 넘어갈 줄 알았어요(최소한 금요일에 잠들기 전까지는요.) 그런데.. 오늘 학교에서 CA로 영화 보러 갔다가 허탕치고, 이렇게 집에 가기에는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어서, 게다가 마침 지갑 안에 5000원도 있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표를 끊어서(그러고 상영관에 들어와서는 내가 왜 ‘여기 들어왔지’ 이 생각 했죠 ㅠㅠ), 결국 봐 버렸습니다.
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나름 장점이라고 할 만한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일단 생각만큼 작위적인, 신파조의 영화는 아니었어요.(솔직히 전 너무나도 억지스러운 신파조 영화를 싫어하거든요. 억지스럽지 않게 눈물 뚝뚝 흘리게 하는 영화는 정말 좋아하지만...) 그니까 작정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울어라. 이런 종류의 억지스러운 영화가 아니었다는 거죠. 또 반공주의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영화도 아니었어요. 아니, 반공이라는 사상 자체가 전혀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이야기는 다 아실 테니 생략하고. 이 영화는 <태극기~>처럼 인간적인 문제를 가지고 접근하려고 시도합니다. 바로 학도병이라는 소재죠. 많은 이들이 별로 기억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리고 전쟁의 치열한 전개 속에서 희생되었고 잊혀진, 그러나 모두가 알아야 하는, 귀중한 의미를 지닌, 정말이지 의미 있는 소재입니다.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전쟁이라는 것만 들어봤지 총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포항을 지키라는 어마어마한 임무가 주어지고 71명으로 구성된 그들만 덜그러니 남겨지고, 이들에게 엄청난 숫자의 북한군이 공격을 합니다. 이런 설정으로 시작했으니, 이 영화는 스스로 영웅 심리에 빠져있고, 전쟁을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학생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여, 전쟁에 대해 무지한 그들이 전쟁의 비참함을 경험하고 전쟁의 참상을 깨닫고 그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 그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반전 메시지를 집어넣고 비극성을 강조 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학생이 중심인 만큼, 그들의 심정과 공감 할 수 있는 많은 요소와 감동 코드가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는 그런 영화가 될 것만 같은 영화죠. 꼭 이런 영화가 안 되더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인간적이고 훌륭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죠. 그리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재료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기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깨부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말 간단합니다. 먼저 말하고 싶은 건, 이 영화는 절대로 민족주의로 빠져들어 “학도병들도 이렇게 나라를 지켰는데 너네들은 뭐하고 있는거냐? 나라를 사랑해라” 이런 식의 뉘앙스의 영화로 빠지기 때문인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사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건 분명히 학도병이라는 좋은 소재를 1회용으로 쓰고 길거리에 내다버리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되잖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냐고요? 화면입니다. 온갖 기교를 다 부린 화면. 뮤직 비디오 같은 화면. 비주얼에만 온갖 정성과 테크닉, 슬로우 모션을 죄다 동원한 전투 장면. 비장하게 보이려고 애쓴다고 하기에는 70% 이상은 잘못 사용했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 음악들. 정말... 무슨 생각인 건지...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은 달성합니다. 만든 스태프들이 안쓰러울 정도로요.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이요? 전혀 없습니다. 이건 그냥 역사에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해 MTV 버전으로 만든 동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화려하게 보이려고, 모든 장면을 치장하기에 바쁩니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두 팀이 로켓포와 탱크까지 동원해서 벌이는 살육극입니다. 안구 정화용 영화란 말입니다. 이런 영화하고 무대뽀적으로 지루하게 때려 부수기만 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비주얼에 신경쓰다보니 영화는 민족주의로 빠지는 것보다 더 참혹하고 더 끔찍한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초반부의 장면 하나를 예로 들어볼까요. 피난민들이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건너야 할 다리를 파괴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떨어집니다. 강석대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을 걱정하죠. 막힌 다리를 어떻게든 건너려고 하는 피난민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다리가 터지는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강석대는 은근하게 있는 폼 다잡고 카메라를 향해 걸어옵니다. 장난칩니까? 다리 폭발 전의 안타까움, 걱정, 참혹함 이런 건 다리 폭발과 함께 다 폭발해버립니다. 정말 무거운 장면에 이런 식의 포장이라뇨. 감각적인 영상이요? 세상에나... 이건 전쟁 영화입니다. 공상 과학 영화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게 무슨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장면입니까? 저 다리 장면만 보고, 솔직히 전 화가 버럭 나서 나오려고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 영화의 전투 장면에는 참혹함이 없습니다. 표현 수위를 12세에 맞추어서 그런 것이라구요? 절대 아닙니다. 영화 수위는 12세 치고는 상당히 셉니다. 15세 판정 정도는 나왔어야 했어요.(그리고 전쟁의 광경을 직접적으로 그려내는 영화가 12세 등급 판정을 받는다고요? 이 사람들 지금 개그하나요?) 비주얼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감독은 군사들을,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고 포탄에 의해서 죽는 병사들의 모습을, 있어 보이는 화면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밖에 여기질 않습니다. 감독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멋있어 보이게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병사들이 죽는 모습에도 엄청난 공을 들여서 꾸며야 되겠군.’ 이런 사고방식으로 만든 전투 장면들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 장면에서의 참혹함을 기대하십니까? 그건 분명히 욕심입니다.
전투 장면 말고도 이 영화는 모든 장면을 다 있어 보이게끔 찍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 결과는 비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코미디 같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오장범과 구갑조가 처음에 대립하는 장면에서의 카메라워크가 무슨 <다크 나이트>를 잠깐 연상시키는 것 같은데... 그야말로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영화의 모래 바람이 부는 운동장이 나오는 장면은 무슨 근사한 마카로니 웨스턴을 찍으려고 작정한 것 같더군요. 배경은 하나같이 다 예쁩니다. 멋진 장면들도 정말 많지요. 근데 그래서 얻을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화면에만 공을 들이다보니 캐릭터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쓴 것 같습니다. 캐릭터 자체에 완전한 이입이 되질 않다보니 그들이 뭘 하던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고 결국 감동이 다가오질 않고 메시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가장 아까운 장면은 오장범이 어머니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 대사에는 분명히 울림이 있고, 전쟁에 대한 비참함과 참혹함, 회의감, 그리고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심리가 들어있는 대사입니다. 그러나 이 대사를 말하는 주인공의 심리에는 잘 공감이 되질 않습니다. 공감을 하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죠.
게다가 이 영화의 캐릭터에는 변화가 전혀 없습니다. 전형적이고 예상 가능한데, 그 예상 가능 범위 내에서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마냥입니다. 이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말죽거리 잔혹사>가 대표하는 깡패들과 공존하는 10대 교실 모습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특히나 그 많은 위기와 전투와 희생을 겪으면서도 오장범과 구갑조는 서로 갈등하고 쥐어뜯고 싸우고 패는데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거나 하나로 뭉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구요. 그러다가 갑자기 인민군 트럭 하나 끌고 오고, 둘 사이는 갑자기 궁합이 잘 맞고 서로 이해해주는 그런 사이가 돼 버립니다. 그리고 이들은 옥상에서, (홍콩 느와르에서의) 주윤발 버전으로 람보식 총질을 열심히 하며 인민군을 거의 학살하다시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나오는 옥상의 결말은 완벽한 느와르입니다. 더 이상 전쟁 영화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죠.(도대체 둘이서 몇 명이나 죽인거야...)
</P>
영화가 이러다보니, 별로 대단해보이지도 않는 배우의 연기가 오히려 영화 속에서 눈에 뜨이는 요소가 됩니다. 탑이나 권상우는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쓸데없이 폼 잡는데 바쁘지만 그래도 영화 자체와는 그럭저럭 어울립니다. 생각보다 나쁘지도 않았구요. 출연하는 곳마다 미칠 듯 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김승우의 존재감이 여기에서는 별로 발하질 못한다. 가차 없는 비인간적인 모습과 학도병들에게 작은 배려를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준 박무랑 대위를 맡은 차승원이 이 영화 속에서는 제일 나았던 것 같고 기억할 만한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이건 정말, 정말, 정말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영화입니다. 전쟁을 너무나도 가볍게 여기고 만든 영화인 것 같습니다. 만드는 데 정말 많은 고생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고생을 하면서 찍은 영상들이 오히려 너무나도 지나쳐서 도를 넘었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입니다.
(마지막으로 공동경비구역 JSA 때부터 계속 이어져오는 정말 뻔하디도 뻔한 결말..)</P>
p.s 1. 이 영화를 아카데미에 출품하겠다고 신청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외국어 노미네이션 되기를 원하고 있겠지.. 뭐... 시의 각본에 0점 준 골빈 영진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2. 천만 관객 동원이요? 제 생각에는 5백 만 관객도 힘들 것 같습니다.
3. KBS에서 새롭게 하는 드라마 <전우>의 첫 회를 보고 쓴 감상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전우나 이거나 드라마와 영화라는 방식만 다를 뿐 퀄리티 차이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4. 개인적으로... 이 여자.. 영화에 나올 필요가 있었나요..? 별로 중요하거나 존재감 있는 역활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왠지 빼도 됐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