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얽힌 10인 10색 스토리...★★★☆
전주국제영화제 10주년 기념작이자 개막작이었던 <황금시대>는 돈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만큼 그 사회를 알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이 어디 있겠는가. 총 상영시간 114분에 10편. 10명의 감독은 다양한 장르적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얘기를 들려준다. 그 곳에서 관객은 웃음, 슬픔, 공포 등의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황금시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무엇보다 뚜렷하게 배척될만한 작품이 눈에 띠질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극단적 장르 취향만 아니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을 10편이나 감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1. 최익환 감독의 <유언> (출연 : 구교환, 이민웅)
칸 영화제 6주년 특별 상영작 <그들 각자의 영화관> 중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작품은 극장 화장실에서 한 남성의 자살을 생중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유언> 역시 마치 자살을 관객이 생중계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 장소에서 한 번에 촬영(원 컷 무비)해 가장 저렴하게 만들어졌을 <유언>은 사기 등으로 자살을 결심한 두 남성에게 일어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영화가 끝난 후 <유언>의 두 번째 버전이 별도 상영되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최익환 감독에게 왜 굳이 두 가지 버전을 만들었냐고 물었더니 “총 제작비 500만원으로 제작했는데 돈이 남아서”라고.
2. 남다정 감독의 <담뱃값> (출연 : 김은주, 김예은, 서민성)
돈 문제와 함께 TV 고발 프로그램의 문제(사전 시나리오에 의한 허위 고발)까지 담고 있다. 한 여성 PD는 여고생에게 돈을 주고 노숙자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을 몰래 촬영한다. 그러나 여고생의 태도로 인해 노숙자가 화를 내다 여고생이 다치게 되고, 이는 노숙자에게 끔찍한 복수로 되돌아온다. 짧은 시간 안에 돈의 흐름과 자본주의의 냉정함을 적절히 표현한 수작.
3. 권종관 감독의 <동전 모으는 소년> (출연 : 기파랑, 김원희)
왕따 소년과 왕따 소녀. 둘이 만나 서로 소통한다는 얘기는 너무 진부하다고? <동전 모으는 소년>은 그런 진부함을 뒤집어 새로운 결론으로 이끈다. 어쩌면 왕따 소년에게 동전 수집과 소녀는 유일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과 설렘이 좌절되었을 때 나타나는 극도의 분노와 파국이 잘 담겨져 있다.
4. 이송희일 감독의 <불안> (출연 : 박원상, 박미현)
불안이면서 동시에 불신의 영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내의 불안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느닷없이 고장난 차는 아내의 불안을 극단으로 밀고 올라간다. 대체 왜 아내는 불안해 하는 것일까? 거기엔 남편과 사회 현실에 대한 불신이 놓여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울며 내려가는 아내의 뒤로 남편의 모습이 아웃포커싱되면서 끝난다. 영화를 보면서 혹시 마지막에 남편이 시동을 거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을까 했는데,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이송희일 감독에게 똑같은 의문을 던진다. 이송희일 감독은 그런 시나리오도 검토하긴 했는데, 박원상 씨의 거부와 열린 결론이 맞다는 생각에 지금 그대로 끝을 냈다고.
5. 김은경 감독의 <톱> (출연 : 유은석, 주은)
이 영화의 결론은 매우 장난스럽긴 해도 공포와 스릴러의 지점을 아주 잘 포착하고 있는 영화다. 특히 혼자 잠을 자던 남자가 자신의 다리를 여자가 톱으로 써는 모습을 꾸는 장면은 잔인하면서도 묘하게 유머러스하다. 여기저기 상처가 있는 여성이 밤늦게 톱을 사고, 아침 일직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등장함에도 이와 관련한 얘기들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도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지점이다.
6. 양해훈 감독의 <시트콤> (출연 : 노형욱, 윤영삼, 소유진, 윤동환, 윤승훈)
왠지 이런 단편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유진이 등장해 어쨌거나 눈이 즐거웠던 영화. (소유진의 술 취한 연기는 대박이다) 이 영화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용산참사를 포함해 재개발 현장에서의 폭력을 비판하고 그 근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우리 사회의 재개발 문화만큼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 것 같다.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를 천박한 방식으로 비판하는 것도 나름 유의미한 듯.
7. 채기 감독의 <가장 빨리 달리는 남자> (출연 : 조성하)
10개의 작품 중 가장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로 제목과는 아이러니하게 어울린다. 아마도 이 주인공은 실직자에서 출발해 홈리스가 됐을 것이다. 추락을 거듭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정상적인 사회 복귀를 위해 나름의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다. 갑자기 날아드는 배드민턴공을 낚아 챌 만큼 준비가 잘 되어 있건만 과연 그에게 직장으로의, 사회로의 복귀는 가능할 것인가.
8. 윤성호 감독의 <신자유청년> (출연 : 임원희, 손순영, 권다현, 이경훈, 진중권, 이명선, 유운성)
윤성호 감독을 처음 만난 건 단편 <우익청년 윤성호>였을 것이다. 그 이후 한 편의 장편 <은하해방전선>과 옴니버스 영화 두 편에서 만난 윤성호 감독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보면서 내내 골 때리는 유머와 MB 정부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마주 대할 수 있다. 객석엔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고. 이 영화엔 돈에 환장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과 함께 미네르바 사건 등 말도 되지 않는 MB 시대의 현실이 담겨져 있다. 영화를 본 뒤, 같이 관람한 사람들에게 즉석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장 많은 사람들이 10편 중 최고라는 평가를 내린 작품.
9. 김성호 감독의 <Penny Lover> (출연 : 조원선, 유형근, 박현준, 이준오)
롤러코스터 출신의 조원선이 주연을 맡아 출연한 영화. 10편 중 가장 감상적이며, 대체 어떻게 500만원으로 만들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작품. 영화계 쪽에선 감독 개인 돈이 추가로 꽤나 많이 들어갔을 것이란 의견. 아무튼 일반적으로 돈에 대한 영화를 의뢰받았을 때엔 영화 제목 <황금시대>의 어감에서 느껴지듯이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영화가 먼저 떠오를 듯싶은데, 연인에게 받은 10원짜리,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동전을 모티브로 멜로 영화를 구상했다는 것 자체가 특이하다면 특이.
10. 김영남 감독의 <백 개의 못, 사슴의 뿔> (출연 : 오달수, 조은지)
일종의 스크루볼 코미디 영화. 영화 내내 오달수와 조은지의 주고받는 대사가 배꼽 잡게 만든다. 물론 둘의 대사 내용이 본질적으로 웃긴 건 아니다. 수개월 밀린 월급을 받아야 하는 조은지나 공장이 멈춰버린 오달수나 고통과 절망의 벼랑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버리지 않는 모습에서 희미한 희망이 느껴지는 영화.
※ 관객과의 대화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영화 관람 후 약 오후 10시)
- 사회 : 신지혜(CBS 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진행)
- 게스트 : 왼쪽부터
김은경 감독(어느날 갑자기, 황금시대-톱)
최익환 감독(여고괴담4, 그녀는 예뻤다, 황금시대-유언 Live)
이송희일 감독(탈주, 후회하지 않아, 황금시대-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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