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In the middle of controversy
뜨겁다.
최근 이렇게 관객들의 '훌륭하다VS쓰레기다' 라는 극단적 평가들로 논쟁이된 영화도 흔치 않다.
보통은 훌륭하다면 훌륭한 영화인거고, 쓰레기면 쓰레기영화인거다.
대중들이 적절한 시점에 한쪽으로 수렴하며 합의를 본다.
그런데 이 두가지 견해가 팽팽이 양립하는 작금의 상황은 무엇인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지만,
가장 근저에는 아마 '박찬욱'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파워가 있지 않나 싶다.
관객들은 박찬욱이 아무 의미없는 쓰레기영화를 만들 사람은 아니라는걸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쓰레기'라고 외치는 관객들은 더욱 호전적이고 분노에 차있다.
한마디로 실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찬욱'이라는 이름아래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것에 배신감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과 같은 평을 내놓는 다수 대중들과 동질감 및 군중심리 하에
'박찬욱' 이라는 '명품 브랜드'를 비난하면서 형성되는 묘한 카타르시스 또한 느낄 것이다.
예컨데, 삼성의 신제품을 구입했는데, 버그투성이 불량품이여서
입에 거품물고 비난하는 것과 같은,, 그런것.
그만큼 관객이 어떤 작품을 접하기 전에 '기대치'라는건 감상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이번 '박쥐'에서는 앞서 언급한 '박찬욱 영화'라는 브랜드 이미지와 함께,
언론의 '호들갑'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금과 같은 논란의 기폭제역할을 했다.
관객은 일단, '거장 박찬욱이 만든 유례없는 벰파이어 영화'라는 점에 주목,
일단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를 기대한 듯 하다.
여기서 문제는 관객들이 한국관객들 특유의 '재미있는 영화'라 칭할만한
본인들의 '전형적 기준틀'에 박쥐를 억지로 끼워맞추며 감상했다는 것이다.
그 '전형적 기준틀'이란,
올드보이의 '플롯구성의 촘촘함'이 될수도 있고, 1000만관중 괴물의 '스펙터클함',
투사부일체에 600만이라는 관객을 안겨준 '마냥 코믹함' 일수도 있다.
박쥐는 이 셋다 해당 안되는 영화이다.
한마디로 나는 박쥐에게 돌을 던지는 관객들에게
'당신은 과연 새롭고 신선한 지점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를 묻고싶다.
이점에서 언론의 행태에도 상당히 유감이다.
언론은 처음부터 '박쥐의 선정성'에만 초점을 맞췄다.
'송강호의 성기노출' 그 자체에는 뜨겁게 주목할지언정, 그 의도에는 말 그대로 '불친절' 했다. 관심이 없었다.
관객의 대부분은, 그러니까 일반대중들은, 언론이 만들어주는 프레임대로 영화의 초점을 형성한다.
언론이 선정성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자연스레 관객의 관심도 그쪽으로 간다는 말이다.
관객은 처음부터 송강호가 이거했대, 김옥빈은 그거했대 하면서 극장문을 들어섰을 것이고,
영화에 대한 초점도 이에 맞춰졌을 것이다.
언론이 비춰준 '박쥐'의 모습은 '굉장히 야하면서 치명적인 사랑을 다룬 벰파이어 치정극' 이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관객들은 아마 한국판 '색계'를 기대하며 '박쥐'를 맞이했을 것이다.
이런 기대를 품고 극장문을 나선 관객들이, 감상 후에 이율배반을 느낀건 당연지사.
박쥐, 그렇다면 감상 포인트는,,
사실 이 영화를 재대로 감상하려면 '박찬욱 월드'에 대한 오픈마인드가 어느정도는 있어야 한다.
감상 포인트를 어느정도 잡아낼 수 있는 상태에서 접해야 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는 박찬욱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전작들을 전혀 접하지 않았어도, 아니면 박찬욱이라는 이름 석자를 아예 몰라도 상관없다.
다만- '새로운것에 대한 열린 마음' '그로테스크함에 대한 관대함'
'장면의 함의에 대한 관심'등의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쩌면 '앎과 모름'의 문제일수도 있다.
그래서 박쥐를 '옹호하는 진영'에서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단순,명쾌하면서도
다소 독선적으로 보이는 반대진영에 대한 '타박'을 내뱉는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필자도 이 논리에 어느정도 동조한다.
언론은 이 영화의 '선정적, 폭력적 장면'만을 강조했고,
다수의 관객들 또한 그 프레임을 그대로 따라 그것 자체에만 주목한채,
그것 자체에 의한 느낌만으로 영화 전체를 평가해 버린다.
'각자 어떻게 느끼고'의 차이라면 그것은 '취향의 문제'겠지만,
'느낄수 있고 없고' 는 '앎과 모름' 문제에 의해 갈릴수 있다.
박찬욱은 이번 영화에서도,
원죄와 구원, 죄의식 및 속죄와 신앙, 금기와 욕망 및 쾌락 사이의 갈등,
그리고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것은 '복수 3부작'등 그의 전작들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문제제기 되어온 테마이며,
또 이것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를 작품내에 훌륭이 녹여낸 것만으로
국내외 평단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었다.
이번 박쥐에서도 조금더 독특하고 신선한 방식으로, 그리고 더욱더 과감하고 괴기스런 모습으로
이런 철학적 사유들을 장면장면마다 제대로 담아내었다.
그러한 장면 장면을 접할때 '그 장면 자체' 만 보이고, 그냥 '선정적이다, 역겹다' 라고만 느낄수밖에 없다면,
그게 그냥 그사람 수준인 것이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그 장면엔 분명, 박찬욱이 여전히 문제제기하고 싶어하는,,
여전히 풀어내지 못한 답안지와도 같은 철학적 숙제들이 담겨있는데 말이다.
물론 그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방식이 맘에 안든다.' '화법이 맘에 안든다'는 의견은 있을수 있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단지 그러한 방식의 표현을 '싫어하는' 관객들이 아니다.
싫어할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어떤것을 이야기 하고자하는 것인지
알면서 비판하는 것과, 모르면서 비판하는것은 다르다.
평론가들의 비판과 관객들의 비판은 그러한 차이를 갖는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또한 '박쥐'라는 영화에 대해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고 있으나
최소한 박쥐를 비판하는 평론가들중 다수에는 '논리'가 존재한다. '근거'가 존재한다.
최소한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또 장면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비판하는 관객들중 다수는 그렇지 않다.
그저 외피만을 보고 영화 전체를 평가할 뿐이다.
'논리'가 없다. '근거'도 없다. '근거'라고 내세운게 궤변인 경우가 많다.
영화의 의도,주제의식, 장면 장면의 이해가 선행되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개인의 자유라면 자유다.
모든 관객이 똑똑해야할 이유는 없으며, 영화전문가일수도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함부로 남이 공들여 만든 작품을,
그것도 권위있는 해외영화제에 초청까지 받은작품을
함부로 '쓰레기'라고 떠벌리고 매도한다면,
그것은 어쩔수없이 '무지의 소치'라는 말을 들을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식한건 죄가 아니나, 무식하면서 아는척하는건 민폐가 될수 있다.
여기서 내가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왜 관객들은 '친절한 금자씨'는 그래도 나름 재미있게 봤으면서 '박쥐'는 쓰레기라고 욕하냐는 점이다.
사실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하기는 '금자씨'도 '박쥐' 못지 않았고,
일반 관객입장에서는 어렵고 개성이 강한것도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혹시 '금자씨'는 수상과 함께 상영되서 그렇고, '박쥐'는 아직 수상전이여서 그런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한국 관객들을 너무 권위에 휘둘리는 소인배들로 평가절하한 것일까?? ㅎ
박쥐, 그 주목할만한 시선들..
결국, 박쥐는 포인트만 잘 잡는다면 정말 치명적일만큼 매력적인 영화라는 이야기를 하고싶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현과 태주,, 사실상 이 두사람만을 위한 이야기를 다룬다.
초반부 상현은 '욕망과 숭고함'사이의 갈등,,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오는 '불안감'을 내재한 인간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이것은 '자살을 죄로 규정했던 신부의 자살' 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영화에 나타나지만,
사실은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배우 송강호는 이를 그만의 색깔로 맛깔스럽게 표현하며 이름값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태주는 밤마다 집밖으로 뛰쳐나간다.
'욕망과 억압'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그로인한 '불안감'을 나타내는건 태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유를 갈망하고 욕망이 드높지만, 그걸 해갈하지 못해 밤마다 뜀박질이라도 하며
욕구불만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둘이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베드신 직후 부활절 달걀을 먹는 태주의 모습에서 보듯,
마치 다시 태어난듯, '그들만의 낙원'에 온듯, '갈증 그리고 치명적 해갈'의 상징인 '벰파이어 커플'까지
탄생되지만, 결국은 무절제한 파국으로 치닫는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도 스타일리쉬한 미장센과 신선한 비쥬얼효과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그리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까지 어우러진 영화가 '박쥐'라는 생각이다.
이건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영화에 나타난 '박찬욱 월드'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박찬욱은 이번에도 등장인물들을 '제한된 공간'에 몰아넣으며 그만의 스타일로 꾸려진 또 다른 세계를
영화를 통해 선물했고, 그것은 그로테스크 하면서도 사람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플롯이 약간 늘어진다는게 이 영화 최대의 약점이겠지만, 본인이 친절하게 만들었다고 밝힌만큼,
이번 영화에는 관객들이 조금만 열린 마인드로 영화를 뜯어보기를 즐겼더라면,
충분히 더 재미있게 영화를 감상할수 있었을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령, 신부 상현이 기도하는척 하면서 손에묻은 피를 핥아 먹을때의 카메라워킹이나,
전신마비 환자너머로 카메라가 담을 넘어가는 듯한 각도로 두 주인공의 병원 베드신을 묘사한것 등의 연출은,
관객들로 하여금, '카메라로도 말을 할수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게 할수 있을만큼의
'함의전달'이 잘 반영된 '친절한' 연출이였다는 생각이다.
대사 하나하나에도 의미심장한 함의가 담겼음은 물론이다.
또한 대사와 대사사이 빈공간을 잇는 연결고리 곳곳에는 맛깔스런 유머들이 배치되어
극의 완급조절 기능을 원할히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유유히 하늘을 날아오른다거나,
벰파이어의 한국적인 라이프를 생동감있고 스타일리쉬한 비쥬얼로
풀어낸 것에 대해서도 후한 점수를 주고싶다.
그런점에서 필자는 영화 박쥐를 '비쥬얼' '스타일리쉬' '작품 구성' '연기' 등
영화 전반에 있어 훌륭한 영화로 평가하며, '훌륭한 영화적 체험'이 될 것이라는데 동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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