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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n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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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14 오후 6:3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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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s/text/comm_good.gif)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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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1997년 늦겨울, 복도를 달려나가 마주오는 녀석의 교복 상의를 움켜쥔다. 그리곤 성적표를 찢어발기듯 세차게 잡아챈다. 이미 내 교복은 걸레가 된 채로. 복도엔 어느새 축구장에 날리는 종이가루들처럼 찢겨진 헝겊조각이 잔뜩 날리고 있었다. 스물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선생님의 호통 속에서도 루즈타임에 동점골을 넣은 선수처럼 환호하고 있었고, 세레모니는 또한 그렇게 과장되어 있었다. 다시는 펼쳐보지 않을 교과서들처럼 구겨버린 열아홉. 소매가 찢겨나간 옷을 입고 교문을 나섰다. 그날 흩날리던 눈발, 우산을 펴서 역류하는 눈을 막던 기억.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들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졸업이었다
그 이후의 날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꽃가루처럼 잔뜩 부풀어 있던 그 겨울에 관해 다만 기억나는 것은, 봄이 왔을 때 내 두 손엔 바싹 마른 풀씨들 몇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메마른 날들의 끝에 내게 건네진 스물, 선물 같은 날들
내게 처음으로 자유와 책임이 주어졌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한 치의 틈도 주지 않았다. 열심히 학과 일을 하고,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학회에 스터디에 하루가 25시간이라도 모자랄 만큼 숨가쁘게 스물을 채워갔다. 그러면서도 아직 '연애'와 '동아리'라는 영역은 남겨두었다. 능력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선물의 매듭을 아주 조금씩 푸는 것이 나의 습성이었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고, 학교생활이 지루해기지 시작할 때에야 동아리에 들어갔다. 길을 동경하는 고양이처럼.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새로운 길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 전이라니, 그리움에 지쳐 이젠 기억마저 흐릿한 그때를 다시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 스물, 그 풍족한 날들의 메마른 정서가 가득한 이 영화.
'고양이는 부탁해'는 머뭇거림에 대한 영화이다. 아이들은 쉼없이 걷고 있지만 또한 쉼없이 주저하고 망설인다. 서로를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때로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이들이 안고 돌아서는 것은 무심함이 빚어낸 상처뿐이다.
버려진 고양이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추스리고, 서로를 보듬으면서 길을 걷는다. 집이 있고, 직장이 있지만 어디도 자신의 둥지는 아닌 것이다. 공항을 뒤로하고 잠시 머뭇거리는 태희와 지영. 그렇지만 그들은 지금껏 그래왔듯 경계사이를 유영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다락방 깊숙이 넣어둔 일기장 같은 영화 아이들을 어루만지던 내가 어느새 잊고있던 '스무살'을 꺼내 보듬어주고 있는 것이다 서툰 질문과 고민들로 점철되었던 그 시간들이, 지금 내 앞에서 희망의 빛깔들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다.
<<cafe.daum.net/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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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2001, Take Care of My Cat)
제작사 : 마술피리 / 배급사 :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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