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주인공들은 이른바 ‘한 방’(숨겨놓은 진면목)이 있는 인물들이다. 비굴할 정도로 손님 비위를 맞추던 할아버지는 죽음으로써 괴물과 맞선 가족애의 화신이고, 만성기면증 환자인 아버지는 바로 기면증 때문에 뇌수술 후유증을 초인적으로 이겨낸다. 술병을 입에 달고 살던 백수 삼촌은 화염병을 움켜쥔 투사로 탈바꿈하며, 양궁시합에서 시간초과가 버릇이던 고모는 괴물에게 불화살을 명중시키는 궁사로 거듭난다. 그렇다면 한강변에서 매점을 하던 가족은 왜 괴물을 직접 때려잡아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던 것일까. 한국과 미국의 정부기관이 소재 파악조차 할 수 없었던 괴물을.
가족들이 나서서 괴물을 찾아야 했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사랑이 하나라면, 무능과 음모로 점철된 정치권력이 다른 하나이다. 따라서 ‘괴물’의 전체적인 구조는 잃어버린 딸을 찾아서 괴물을 추적하는 가족 드라마와, 있지도 않은 괴(怪)바이러스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적 음모론의 이중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하지만 가족 드라마에 대한 묘사가 지루할 정도로 치밀하다면, 정치적 음모론과 관련된 장면들은 다분히 에피소드적으로 제시된다. 정부가 하는 일이라고는 허술한 방식으로 한강변 접근을 차단하고 괴물과 접촉한 사람들을 관리하는 정도이다. 바이러스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괴물을 찾으려는 어떠한 노력도 보여주지 않는다.
문제는 가족 드라마와 정치적 음모론 사이의 서사적 불균형이 개연성과 관련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괴물은 움직일 때마다 쿵쾅거리며 굉음을 내는데, 왜 한국정부는 괴물을 찾기 위해 한강 다리에다가 진동 탐지기를 설치하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괴물과 접촉한 한 명의 미군이 사망했다고 해서, 특별한 정치적 배경도 없이 바이러스가 괴물보다 공포스러운 대상으로 둔갑할 수 있을까 등등. ‘괴물’은 정치권력을 상투적인 음모론의 틀 속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비판적인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작품 곳곳에 개연성에 대한 잠재적인 불신의 지점들을 들여놓게 된 것은 아닐까.
예상했던 바이지만 ‘괴물’에 대한 영화 담론은 개봉 전에 작품성에 대한 검증이 끝났으니 관객동원 신기록에 참여도 하고 구경도 하자는 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한국영화를 짊어질 젊은 감독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일은 무조건적인 상찬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성찰적인 대화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괴물’은 관람료가 전혀 아깝지 않은 영화였고, 충분히 즐거웠다. 그뿐이다. ‘걸작’이니 ‘전대미문’이니 하는 과대포장의 수사학은, 감상의 장애물이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