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아라", "거짓말하지 말아라"는 얘기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및 주위 어른들로부터 거의 각인되다시피 수백, 수천번 듣지만, 세상은 이런 덕목을 꾸준히 지켜서는 절대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요즘은 그리 나이를 많이 먹지 않아도 곧잘 깨닫게 된다. 학창시절 때에는 성적을 둘러싼 친구들과의 경쟁, 사회에 나가서는 성공을 향한 동료들과의 경쟁 등 어리고 나이많고를 불문하고 모든 이들의 삶이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는 현실에서, 온전히 도덕적이고 바람직한 플레이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지능보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약육강식이라는 살벌한 법칙이 존재하는데, 온갖 술수와 계략이 넘쳐나는 인간들의 세계에선 오죽하랴.
이 영화 <비열한 거리>는 이렇게 차마 삼키기 힘든 쓰디쓴 현실을 다시금 되새김질해주는 영화다. 우리는 보통 현실에서는 쉽지 않더라도 영화를 통해서만은 "착한 사람이 이긴다", "나쁜 놈들은 그에 따른 벌을 받는다"는 진리를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기대를 철저히 배반한다. 싸늘한 현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싸늘하기만 하다.
조폭조직 로타리파의 2인자로 활동중인 병두(조인성)는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다. 하는 일이라곤 떼인 돈 받아오는 정도의 일인데, 오랜 세월동안 터전의 집은 철거촌 안에 위태롭게 자리잡고 그 수명이 오늘내일 하고 있으며, 홀어머니는 몸이 많이 위독하신데다 남동생은 형을 본받으려 그러는지 자꾸만 엇나가려 한다. 비록 조폭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집안은 충실히 먹여살리려 하는 병두의 입장에서는 골때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가까스로 오락실 경영 일을 맡게 되어도 경쟁조직과의 치열한 자리 싸움 뒤에 일자리를 뺏기는 등 뭐하나 제대로 정착해 하는 일이 없다. 형님한테 한번만 사정 좀 봐달라고 해봤자 "너도 이제 자립해야 하지 않겠냐"는 냉정한 충고만이 날아올 뿐. 때마침 초등학교 동창 민호(남궁민)가 조폭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병두를 찾고, 병두는 민호에게 자신의 삶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민호의 도움으로 오랫동안 사모했었던 동창 현주(이보영)도 만나 사랑을 키워가게 된다. 이러던 병두에게도 해뜰날같은 기회가 찾아오는데, 바로 조직의 뒤를 봐주던 황회장(천호진)의 눈에 들게 된 것. 황회장과 꽤 친분을 쌓게 된 병두는 이 기회를 노려 황회장이 원하던 박검사 처리 문제에 뛰어들기로 하고, 결국 성공하면서 확실히 눈도장을 찍게 된다. 이제 철거촌 집을 떠나 새집도 장만하고, 동생들도 더 잘 챙겨줄 수 있을 것이고, 민호와의 우정, 현주와의 사랑도 더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 믿지만, 세상은 병두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행복을 내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조폭 영화 신드롬이 불게 된 이후 나온 조폭 영화들을 분류한다면 크게 두 가지로 갈릴 수 있다. 미화하거나 혹은 희화화하거나. 있는 그대로 조폭이라는 대상을 관찰하기 보다는 멋있고 폼이 살게 표현하거나, 아니면 특유의 우직한 이미지를 극대화시켜 코미디의 대상으로 표현하는 식으로 말이다. 오히려 조폭 영화가 신드롬으로 불기 전에 나온 <게임의 법칙>이나 <초록 물고기>같이 깊은 성찰과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진짜 조폭 영화들은 신드롬 중에는 거의 나오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이 영화 <비열한 거리>는 역시나 조폭을 주인공으로 했음에도, 조폭들의 행동 양식을 웃기게 표현하지도 않고, 조폭들의 일상을 멋있게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리얼리티에 심혈을 기울인 듯 싶다. 뭔가 시각적으로 정제되고 멋있어보이는 스타일은 특별히 드러나 있지만, 대신에 거친 세계를 누비는 조폭들의 삶처럼 걸러지지 않은 사실감이 영화 전체에 살아 있다.
주인공인 조인성의 연기에서도 이런 리얼리티가 꽤 묻어나왔다. 사실 이 배우, 브라운관에서는 꾸준히 흥행가도를 달려왔지만 스크린에서는 <마들렌>을 비롯하여 <클래식>(흥행은 괜찮았으나 비중은 특별출연급이었다), <남남북녀> 등 모두가 안습적인 결과를 가져왔었다. 이번 영화는 유하 감독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으나 원톱으로 끌고가는 분위기라 역시나 좀 우려가 되긴 했으나, 그 우려는 그의 제대로 폼이 살아나는 연기에 힘입어 기우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조인성이 그동안 그저 외모만 부각시키기에 바쁜 이미지 중심의 배우가 아닌 연기 중심의 배우가 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왔으나 다소 부족한 면도 있었다.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기보다 살짝 과장되거나 극대화되어서 오히려 공감대 형성이 몇프로 부족했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이번 <비열한 거리>에서의 병두 연기는 그런 과장됨을 조금씩 극복해나가면서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융합될 줄 아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 속에선 직업 특성상(?) 수트를 많이 입는데, 사실 조인성은 암말 않고 수트만 입고 그저 서 있어도 그림이 되는 배우이다. 단지 얼굴 한번 찡그려도 주체할 곳없이 혼란스러워 하고 방황하는 듯한 청춘의 이미지가 그대로 재현되는 그런 배우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꽤 쫄깃한 사투리 구사,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에 솔직한 표정 연기, 절대로 멋부리지 않고 말그대로 마구잡이로 펼치는 액션 연기 등 자신의 비주얼에 의존하지 않고 영화의 리얼리티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규모 패싸움에서 손에 피칠갑을 해가면서 칼부림을 하고, 조폭으로서의 삶 앞에서 때론 외로이 분노하고 때론 허탈해하며 주저앉는, 격한 감정에 휩싸인 인간의 모습을 상당히 밀도있게 보여주며 비주얼로만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말과 행동, 적극적인 연기로 비열한 거리에서 홀로 비틀거리는 남자의 이미지를 보다 복합적으로 구현해 내지 않았나 싶다. 분명 올해 최고의 연기다 이런 수준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연기 면에서 "기대주" 평가만 받아왔던 배우가 원톱 주연으로 나선 영화에서 이만큼 충만하고 아쉬울 것 없는 스크린 지배력을 갖췄다는 것은 꽤 주목할 만한 일이다.
주연급인 천호진, 남궁민, 이보영 등의 연기 외에 주목할 만한 배우가 있다면 병두의 오른팔 종수 역을 맡은 진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겐 <올인>의 이병헌 아역이나 <논스톱 5>의 발랄한 청년이라는 대립된 이미지로 기억되는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는 어쩌면 입체적이고 다중적이라고 할 수 있을 종수 역할을 상당히 잘 소화해내었다. 대사 구사는 둘째치고, 표정에서 묻어져 나오는 충직할 것 같으면서도 냉정할 것 같은, 우직함과 싸늘함이 공존하는 그 비주얼이 꽤 인상적이었다. 유하 감독이 <말죽거리 잔혹사> 때부터 "기대주" 급의 젊은 배우들을 곧잘 캐스팅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이렇게 연기의 가능성이 훤히 보이는 젊은 배우들을 잘 뽑아낸 것 같아 만족스럽다.
조폭 영화답게, 이 영화 속에서도 액션 신들이 꽤 나온다. 그러나 이 액션 신들은 코믹함, 비장미, 스타일리쉬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오히려 관객들이 질려 할 때까지 끈질기게 나오는 액션 신들은 그쪽 세계의 치열함과 잔인함을 더욱 더 온전히 복원시킬 뿐이다. 오락실에서 오락 기계들에 머리를 처박고 싸우는 장면은 애교다. 최고의 액션 신은 뭐니뭐니해도 진흙탕에서 벌이는 대규모 패싸움인데, 영화는 슬로우모션 등의 촬영기술은 일체 사용하지 않고 그저 진흙탕에 하염없이 나뒹구는 수많은 조직원들의 피 튀기는 싸움을 꾸밈없이 쫓아간다. 파이프, 방망이 등으로 사정없이 상대를 후려치고, 나중에는 칼까지 꺼내 사정없이 온몸을 긋는 그들의 모습은 수시로 비춰지는 표정의 일그러짐과 상처의 클로즈업까지 더해지면서 비참하고 혼란스런 분위기를 극대화시킨다. 이렇게 영화는 때깔을 포기하는 대신에, 치열하고 사정없는 조폭 세계의 생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 집중하면서 기존의 조폭 영화가 보여주는 식상한 표현이 가지는 장애물을 말끔히 제거해냈다.
이런 리얼리티 추구는 영화 속에서도 그 의미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데, 민호가 병두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영화 속 영화인 <남부건달 항쟁사>를 찍는 장면이 그것이다. 돌려차기, 날라차기까지 하면서 멋있게 액션을 구사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고 병두가 못마땅해 하면서 즉석에서 교습(?)을 해주는 장면은 어쩌면 그저 폼만 멋있게, 때깔만 좋게 조폭영화를 만들려는 한국 영화계에 대한 따끔한 일침일는지도 모른다.
평론가들의 얘기처럼, 조폭(서양의 경우 흔히 "마피아")의 세계를 다룬 영화에서 배신, 음모라는 것은 어쩌면 필수 요소이기에, 역시나 비열한 조폭의 세계를 다룬 이 영화 역시 다소 전형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병두 또한 이런 세계에서 희생을 당하게 되고.(스포일러는 결코 아니다. 예고편에서 배를 움켜잡고 비틀거리는 병두 뒤로 "다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황회장의 멘트가 깔리는 것만 봐도 결말은 쉽게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지 조폭 세계만의 비열함을 강조하면서 그 속에서 비장미를 끄집어내고 있지는 않다. 이 영화엔 비열함은 있되, 그 뒤에 여운처럼 남는 비장미는 없다. 배신과 음모를 밥먹듯이 일삼는 이들의 치졸함, 뒤통수를 갈긴 뒤에 새롭게 축배를 드는 사람들의 안일함, 그런 야비한 순리 속에 희생당한 이들의 쓸쓸함만 남을 뿐이다.
거기다, 이 영화가 강조하는 세상의 비열함은 단지 조폭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폭 세계에 종사하고 있는 병두와 함께, 영화 감독 일을 하는 민호와 현주까지 얽혀들면서 세상 전체가 갖는 냉정한 논리를 영화는 역설하고 있다. 병두 또한 이런 냉정한 논리 속에서 희생당하는 한낱 인간일 뿐이고.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조폭"이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조폭 일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이 주인공인 영화라고 하는 게 더 알맞을 것이다. 병두는 조폭이지만 다른 영화에서처럼 그의 정체성으로서 "조폭"이라는 면만이 강조되지는 않는다. 여러모로 불상사가 겹치는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고,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 앞에서 직업 특성상 어쩔 줄 몰라하는 개인적 감정까지 드러내는 등 내외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펼쳐 놓고 있는 것이다.
병두는 어쩌면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기에 너무 뜨거운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세상이 너무 차가웠다고 해야 할까. 병두는 그래도 자신의 불안정한 삶 속에서 동생들과의 의리, 식구로서의 의리를 강조하고, 친구들과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 가정의 행복도 키워가면서 나름대로 순수한 열정을 키워가려 노력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순수한 열정을 그저 순수하게 보존할 수 있게끔 가만 놔두질 않는다. 언제 누가 뒤에서 칼을 꽂을지 모를 조폭들의 세계에서 그는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하며, 심지어 친구라고 있는 놈마저도 자신의 뒤통수를 휘갈긴다. 병두 주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남들이 인정할만한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배신과 술수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뒤에서 스러져가는 이들의 목숨은 돌볼 여유도 없이, 그저 자신의 앞길만 바라봐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인 것이다. 그저 행복하고 싶어서 뒤도 안돌아보고 달려왔던 그의 앞에 펼쳐지는 파국은 마치 "그저 곧이곧대로, 정직하게 사는 것은 죄"라는 걸 인정하라고 강요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없이 씁쓸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그의 열정 또한 비열한 세상의 논리에 어느 정도 영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는 것을 영화는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그 자신의 가족이 철거촌 주민으로서 고통을 겪었음에도 나중에 성공을 위해서 다른 철거민들을 위협했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형님의 뒤에서 칼을 꽂는 등 그 세계의 냉정한 논리를 어느 정도는 따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 영화는, 세상은 한치의 동정도 없이 싸늘하고 비열하고, 이런 세상에 둘러싸인 "나"라는 존재 역시 그런 세상의 특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때론 그 냉혹한 순리에 희생당하고 때론 어쩔 수 없이 그 순리에 스며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 뜨겁게 살기에 세상은 너무 찬 것일까? 한껏 불사를 열정마저 허무하게 식혀버릴 만큼 세상은 냉정한 것일까? 믿음, 소망, 사랑같은 덕목들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향이긴 하지만서도, 이런 덕목들이 무참하게 짓밟히며 비열한 배신과 무관심이 팽배해 있는 세상은 안타까움과 허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정적 모습이지만, 이런 순리가 현실 밑바닥에서 멀쩡히 꿈틀거리고 있기에 더 슬프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결말에서까지 충분히 우울해질 만한 비관 모드로 흘러가고 있지만 멀쩡히 곁에서 살아숨쉬고 있을지도 모를 현실이기에 더 짠한 여운을 남긴다. 병두의 비극에 안타까워하지만서도, 나 자신 또한 누군가를 짓밟고 그 위에서 축하의 잔을 기울인 적이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비열한 거리 위에서 어느덧 면역성을 갖고서 무감각하게 적응해 가고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무겁고 암울한 영화가 왜 블럭버스터가 어울리는 여름 시즌에 개봉하는가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영화 보기 직전까지도 그런 생각은 여전했고. 그러나 영화를 본 뒤, 그 의문은 꽤 깔끔하게 풀렸다. 이 영화는 여름 시즌에 딱 어울리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병두와 관객들을 희롱하고 괴롭히는 동정 없는 세상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마저 무색케 할 만큼 싸늘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유하 감독의 "폭력 3부작" 중 두번째라고 했다. 폭력은 다른 게 아니다. 순수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를 기회마저 박탈한 채 코너로 몰아넣고 어퍼컷을 날리고 차갑게 얼려버리는 이런 세상의 비정함이 바로 폭력이다. 그래,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이 차가운 얼음장같은 현실의 거리를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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