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끔찍하게 아름답고, 냉혹하게 낭만적인 |
|
씬 시티 |
|
|
jimmani
|
2005-07-01 오전 1:38:09 |
1712 |
[5] |
|
|
만화를 '영화화하는 것'과 '영상으로 옮기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영화라는 말이 실제 배우들이 등장하는 실사 영화라는 전제를 깔면, '영화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원작 만화가 갖고 있는 특성을 영화에 맞게 좀 변형시킨다는 것이리라. 만화에서 보여졌던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인 부분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사실적인 것에 가깝게 표현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영상으로 옮긴다는 것'은, 원작 만화가 갖고 있던 과장됨 혹은 적나라한 구석을 그대로 스크린에다 옮긴다는 점에서 '영화화'와 어쩌면 좀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지금부터 얘기할 영화 <씬 시티>는 당연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면서, 여타 만화 원작의 영화들과 확실히 그 궤를 달리 한다. 내가 이 영화의 원작 만화를 본 적은 없으나, 몇몇 접한 만화 속 한 장면을 본 기억에 의해서도 그렇고 이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정말 만화 속 한 장면에 마법을 걸어 동영상으로 변화시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는 진짜 만화책에 카메라를 들이댄 듯한 그런 느낌. 영화의 줄거리는 크게 세 줄기로 전개된다. 망나니 난봉꾼으로 소문난 사나이 마브(미키 루크)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인간적이고 진심어린 태도로 대해준 고급 창녀 골디(제이미 킹)이 자기 품에서 죽음을 당한 사실에 격분해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죽은 골디에게는 쌍둥이 언니인 웬디가 있었고, 몇 번의 충돌 끝에 웬디는 마브의 복수로 향하는 길에 합류하게 된다. 한편, 드와이트(클라이브 오웬)라는 남자는 막 사귀기 시작한 셸리(브리트니 머피)를 괴롭히는 그녀의 전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재키 보이(베니치오 델 토로)를 혼쭐 내주는데, 이에 격분해 재키 보이가 일행들과 함께 뛰쳐나가자 그가 여자들을 괴롭힐 것을 우려한 드와이트는 재키 보이를 저지하기 위해 함께 따라나선다. 그들은 창녀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올드 타운으로 오게 되고, 창녀들과 드와이트가 얼떨결에 합세해 또 수작걸려는 재키 보이를 죽이게 되는데, 알고보니 그는 그냥 건달이 아니고 왕년의 경찰 영웅이었다. 본의 아니게 경찰과 창녀들 사이의 휴전을 깬 셈이 된 상황에서, 드와이트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선다. 또 다른 한편, 8년전 납치된 어린 소녀 낸시(제시카 엘바)를 구했으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형사 하티건(브루스 윌리스)는, 낸시가 또 한번 위험에 처했음을 알고 거짓 자백을 통해 감옥을 나와 낸시를 보호하기 위한 생애 마지막 '임무'에 뛰어든다. 내용은 둘째치고 이 영화가 가장 눈에 띄는 점이 비주얼인지라, 그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안그래도 범죄로 인해 타락한 도시를 뿌옇고 아득한 듯 시커멓게 보여주는 화면은 영화의 비정하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를 확실히 살려준다. 흑백 영화 시절에 만들어진 다소 과장되지만 비장한 느낌을 주는 흑백 영화를 볼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흑백과 컬러가 물 만난 설탕마냥 서로 잘 녹아들어 보여주는 화면빨은 정말 '전대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색다른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온통 무채색으로 가득한 흑백 화면에서 보여지는 단 하나의 빨간 드레스, 단 하나의 금발 여인의 모습은 여타 영화에서는 비교도 안될 만큼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을 보여준다. 흑백 화면에 홀로 칼라빛으로 흩어져 있는 노란 핏자국, 회색빛 얼굴을 뒤덮는 붉은 핏방울들은 앞에서 얘기했듯 정말 만화책 한 페이지를 보고 있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다준다. 중간에 몇 번 나오는, 사람이 화면의 흰 여백으로 표현되는 장면은, 정말 '저렇게 창조적으로 사람의 실루엣을 만들다니'하는 생각에 절로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흰색과 검은색, 채색과 무채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영상은 말그대로 '아름답다'는 느낌이 절로 들게끔 만들었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이미지를 마음대로, 그러나 너무나 멋지게 '갖고 놀았다'.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은 눈꼽만큼도 나올 틈을 못주게. 매력적인 화면만큼이나 매력적인 부분이 바로 배우들의 면면이다. 로드리게즈 감독이 이렇게나 인맥이 두터웠구나 싶을 정도로 그 캐스팅은 세대를 초월해 화려하다. 브루스 윌리스나 미키 루크처럼 현재보단 왕년의 스타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배우들에서부터 베니치오 델 토로, 클라이브 오웬같은 굵직한 연기파 배우들, 거기에 브리트니 머피나 제시카 알바, 일라이저 우드, 조쉬 하트넷같은 젊은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정말 배우들 보는 맛이 확실히 있었다. 거기다 각 배우들이 맡은 캐릭터들이 겉돌지 않고 한편의 영화 속에 퍼즐 맞춰지듯 절묘하게 어우러졌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브루스 윌리스에게선 예전 <다이 하드>에서 보여준 젊고 왕성한 혈기 대신에 보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열정만은 대단한 모습에서 영화 속 하티건 형사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졌고, 미키 루크는 예전에 보여준 김치가 필요할 느끼한 연기에서 벗어나 보다 여유롭고 인간적인 연기가 보였다. 확실히 그는 얼굴이 좀 망가지고 난 뒤에 연기력이 한결 깊어진 듯 하다. 베니치오 델 토로는 그 뛰어난 연기력은 능글맞은 악역을 맡아도 어디가지 않는다는 걸 보란듯이 증명했고. 제시카 엘바는 떠오르는 청춘 스타답게 섹시한 매력과 보호본능을 양손의 칼마냥 자유자재로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일라이저 우드가 맡은 악당 '케빈'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 연약하던 '프로도 나리'가 180도 변신했다는 점도 그렇고, 날렵한 눈빛에 오차 하나 없는 초강력 '권법'과 잔혹한 식습관, 그에 맞지 않는 모범생 의상이 상당히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참 종잡을 수 없는 감독이 아닌가 싶다. <엘 마리아치>, <데스페라도> 등에서는 비장감 넘치는 폼나는 액션을 선보이는가 싶더니,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선 유혈낭자한 잔혹 액션을 선보였다가, <스파이 키드>에선 어쩌면 어른들이 보기에 낯간지러울 수도 있었을 만화적 가족 액션물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영화에는 그러한 로드리게즈 감독의 스타일이 그대로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그의 스타일대로 설명하자면, <엘 마리아치>나 <데스페라도>처럼 비장하면서, <황혼에서 새벽까지>처럼 잔혹하기 짝이 없고, <스파이 키드>처럼 만화적이기도 하다. 주된 세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의 입장은 하나같이 '장난'이 아니라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다. 마브는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고,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의 죽음에 진심으로 분노해 복수에 나서고, 드와이트는 경찰과 여자들의 세력 다툼 한가운데에 연루되어 그야말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며, 하티건은 너무도 순수한 천사같았던 한 소녀의 안전을 위해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를 모험을 감행한다. 모두 남성들의 외로운 싸움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마초적이고, 그만큼 비장하다. 비장한 마음으로 각자의 일에 임하는 만큼, 그 방식은 은근하고 잔혹하다. 머리 자르는 건 기본이고, 사지를 자르거나 칼이 눈을 관통한다거나 머리를 말그대로 '뚜껑 열리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맨손으로 남성의 중요 부분을 무참히 '뜯어내기'까지 한다. 만약 실사 영화로서의 색감대로 그대로 표현됐다면, 우리나라에서 '제한상영가'를 받고도 남았을 화면들이다.(<킬 빌> 1편도 한때 제한상영가를 받았으니...;;) 그러나 이런 잔혹한 장면들은 비현실적인 색감때문에 한층 덜 잔혹하게 보인다. 귀가 잘려나가거나 팔이 잘려나가거나 해도 피가 노란색으로 나와서 그 잔혹함을 좀 유화시킨다고나 할까. 과감한 신체 훼손과 특이한 색감 면에서 만화적인 구석도 다분히 엿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렇게 마냥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시각적 쾌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이 영화에는 의외로 진지한 '낭만'이 존재한다. 주인공들의 이런 잔혹한 폭력 행위들도 그들 나름대로 낭만어린 진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벌이는 살육으로 보이게 하지는 않는다. 마브는 자신을 인간답게 대해준 골디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그 배경은 그동안 그의 험악한 외모나 행동들로 인해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해야만 했던 아픈 과거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그런 아픈 현실 속에서, 골디는 진심으로 '당신이 필요해'라면서 인간적 소통을 시도했고, 그러면서 골디는 마브에게 자신의 인간적인 면을 인정해주었고 그 때문에 당연히 보호해야 할 '여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다른 여인들은 모두 흑백이지만 오직 골디만이 그에게 아리따운 금발의 여인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티건 역시 낭만을 갖고 있다. 그는 8년전 11살의 낸시를 극적으로 구했으나 감옥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도 꾸준히 보내준 낸시의 편지 덕분에 수많은 좌절의 순간도 밟고 일어섰다. 그에게 있어서, 낸시는 단순히 구출이 필요했던 피해자가 아닌 유일한 삶의 이유를 제공하는 정신적 구원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낸시에 대한 애정은 나이가 들면서까지 변치 않고 꾸준히 지속된다. 낸시가 갖고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끝까지 품고 있는 것이다. 마브에게 골디가 그랬듯, 하티건에게 낸시 역시 삶의 목표나 마찬가지인 일종의 '여신'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노병은 죽고, 어린 소녀는 산다. 공평한 거래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낸시의 아직 여리고 젊은 목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점들에서, (잠시 딴 얘기지만)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마초적인 터프함만 갖고 있던 남자 캐릭터들의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판타지도 일정 정도 함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여자들은 모두 창녀들이고 남자들은 모두 그녀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심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구석이 있다고 보기 쉽지만, 실은 여성들이 은근히 남성들을 지배하는 원동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창녀들이 법집행자나 마찬가지인 올드 타운에서는 그러한 강력한 여성들의 권력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은 물론, 앞에서 얘기한 마브와 골디, 하티건과 낸시의 경우도 여성들이 남성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양식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은근한, 그러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 캐릭터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신념을 바꿀 각오가 되어 있게 할 만큼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여신마냥 섬기며 상징화하는 것이고. 말이 좀 많았지만, 암튼 이 영화에는 이렇게 여러가지 복합적인 면면이 맛깔나는 비빔밥마냥 골고루 잘 버무려져 있다. 매니아들에게만 어울릴 B급 영화같은 인상을 띠면서도, 끔찍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냉혹하고 비정하지만 한편으론 애틋하고 낭만적인 구석도 고루 갖추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배경이 범죄가 빈번한 어두운 도시라고 해서 늘 어둡고 불쾌한 느와르인 것만은 아니다. 때론 자극적이고 때론 은근한 감정의 움직임을 주는 곳이 이 곳, <씬 시티>이다.
|
|
|
1
|
|
|
|
|
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