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 잔혹사>-억압의 향수... 그리고 추억의 시간 여행
---억압의 향수
영화가 시작하면 지금의 소위 ‘이소룡’세대들은 열광할 것이다. 당시 모든 남자아이들이 쌍절권을 돌리게 만들었던 이소룡이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극장 앞에서 이소룡의 몸동작을 주시하던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쌍절권을 돌리다 온 몸에 피멍이 들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소룡’이라는 중심적 소재를 정면에 내세움과 동시에 현수의 등교길에 당시 ‘유신 시대’의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대화를 건넨다. “구국의 유신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는 표어와 선도부 감투를 쓰고 교문 앞에서 눈알을 부라리는 학생들, 야구방망이로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선생님, 두발 단속, 교복단속, 그리고 검정색 승용차에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일제히 “충성”을 말할 때 관객은 아연실색한다. 말로만 듣던 ‘유신’이라는 단어, 그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짧은 시간안에 경험한 관객들은 긴장과 함께 그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게 된다.
지옥같은 등교버스, 버스 안내양, 올리비아 핫세, 통기타와 팝송 , 티비가 아닌 라디오, 길거리의 대부 포스터 ,신당동 떡제비, 고고장 .... 영화 속 세세한 부분들은 70년대 그 시절 고등학생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펜트하우스를 돌려보던 기억 , 농구 한 게임으로 우정을 쌓고 쉬는 시간에 ‘사망유희’를 따라 하던 기억, 친구들과 고고장에서 대학생 흉내를 내던 기억들은 영화가 디테일에 얼마나 신경썼는지 보여준다. 낡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마냥 빛바랜 사진들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스크린에 투영된다. 하지만 향수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단지 이런 빛바랜 낡은 사진들만이 아니다. 영화가 카메라를 비추는 곳은 학교이며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겪어야 했던 억압과 폭력, 핍박의 교육과 정치, 기생충들이 판치는 사회의 모습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마냥 우리는 파시즘적인 유신의 시대를 보게 된다. 박정희식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것은 ‘폭력의 문화’였다. 그 시대는 어찌그리도 폭력이 난무했을까? 단순히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주먹다짐이 아닌 지배와 굴림의 수단으로 폭력이 쓰인 것이다. 전 국민을 ‘아메바’와 같이 만들기 위해서 또 그런 국민을 관리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폭력이었다. ‘고문공화국’으로 불렸던 그 시절 잔혹하고 무자비한 통치는 곧 바로 교육현장에도 전이 되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 어른들을 흉내는 아이마냥 학생들도 곧 독재의 단 맛을 맛보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위에 굴림 하려하고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답습한다. 주먹과 권력만 있으면 세상을 다 지배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권력위에서 놀고 싶은 본능적 인간들은 성악설에 근거한 홉스의 말처럼 끊임없이 권력 투쟁을 벌이고 그 권력에 기생하려한다. 권력 투쟁의 밖에서는 아웃사이더들의 ‘눈치작전’이 펼쳐진다. 쓰리스타에 벌벌기는 교관과 다친 쓰리스타의 핏덩이를 직접 업고가는 교장의 모습에서 권력이 만들어낸 희생양들을 웃음반 미움반으로 지켜본다.
무서운 선생님이 들어오면 수업시간 내내 학생들은 긴장하게 된다. 누구에게 불똥이 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다. 교육이라는 의미 보다는 ‘훈련’의미가 더 강한 그 힘겨운 시간들을 편안하게 지켜보는 것은 어쩌면 그 때보다는 무너졌던 ‘인권’과 ‘민주주의’가 바로 섰기 때문이다. 영화가 표방하는 제목처럼 영화는 잔혹하기에 그지없다. 억눌렸던 당시의 시대 상황만이 아니라 학생들이 구타당하는 장면과 오프스크린에서 들려오는 매질소리와 구타소리는 직접적인 이미지보다도 더 무서운 호러가 된다. 상상해보라 뇌가 흔들릴 정도의 체벌... 인간성이 마비되는 시간을 말이다...영화는 그렇게 ‘맞고자란’ 그 시대의 고등학생들을 웃으면서-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쳐다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는데 누르고 누르다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연히 폭발하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억압과 부조리의 상황을 지켜보고 자란 현수의 성장 영화이다. 너무나 여린 현수는 지극히 평범한 모범생이다. 아버지의 가르침 ‘정신일도하사불성’을 가슴에 새기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학생이다. 하지만 그가 피부로 느낀 사회와 교육은 이성을 가진 학생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의 친구 우석은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저돌적이고 “가오”를 지키며 사는 인물이다. 이 둘은 제도권에서 물러난 인물들이다. 권력을 잡고 있는 학교의 주류에서 벗어나서 그들은 그들만의 우정을 만든다. 현수와 우식은 주먹과 기생으로 만들어진 서열화에 편승하기 싫은 ‘지조’있는 친구들인 것이다. 현수와 우식은 제도권에 저항하는 외로운 투사들이다. 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친구가 제도권과 벌이는 전쟁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그들에게 손 내밀고 연민의 눈을 보내는 이들은 없다. 선도부원인 종훈과 우식의 결투에서 우식에게 도움을 줄 이들은 없었다. 이미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그들 편이 우식을 처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식의 패배는 예견된 것처럼 무기력하고 씁쓸하다.
“절권도는 돌아볼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길이 정해졌으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우식에 이은 현수의 외로운 싸움은 현수에 대한 복수내지 옳은 것을 선택한 그의 길이다. 학생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 서열화 시켜서 인간을 등급화 시키는 학교는 평등하지만 그것은 소위 가진자에 한해서만 인권이 보장되었다. 현수는 자신의 소시민적 자세를 벗어버리고 몸을 단련한다. 그의 외로운 항거는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 만든다. 결국 승리를 한다는 뻔한 구조이지만. 집단에 맞서서 쌍절권을 휘둘러 대는 현수의 모습은 숨죽였던 이성의 마지막 투쟁이었다. 현수가 학교를 술렁이게 만들고 걸어나오는 장면에서 그는 혼자이다. 모든 학생들이 창문으로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두가 유신 시스템 안에서 안주하고 저항하지 못했을 때,,, 현수는 “대한민국 교육 쫒까라 ·”라며 걸어나온다. 어쩌면 감독이 아니 ..모든 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 닭장 안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시간과 길에 대한 영화
영화는 시간의 연속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엔딩에서 이소룡의 시대에서 성룡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여주듯이 시간의 영화이고. 그 시간이 흐른다는 것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간.... 과거를 다시 쓸 수는 없지만 회상과 추억은 가능하다. 이 영화에서는 기억에 대한 확인과 유추는 없다.-우식이 사라지고 그 후일담은 전하지 않는다. ‘가오’를 지키는 그의 의견을 존중함과 동시에 기억이기에 굳이 밝히지 않는다.- 영화는 머릿속의 회상이며 추억이기 때문이다.
78년 고등학생들의 추억을 가슴으로 훈훈하게 얘기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음세대들에게 전하고 있다. 영화는 이소룡에서 성룡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단순히 추억을 펼쳐서 그 시대의 담소-우정과 사랑-를 나누기보다도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그 연속성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사고 친 현수를 대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두 사람을 함께 비춘다. 막다른 골목이 아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다는 ‘시간’을 말하고 있으며 이 영화가 끝이 아닌 시리즈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영화를 보는 이들도 언젠가는 자신들의 청춘을 다룬 영화를 접할 것이고 그 영화를 들고 자신들의 다음 세대와 소통하려고 할 것이다. “근데 이소룡은 대학 나왔냐?”라고 물어보는 아버지의 포용력은 자신이 주인공인 세상이 아닌 아들이 주인공인 세상이 왔다는 것을 인지하며 그 주인공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는 것이다. 이제 그 주인공이 지금의 주역들에게 대화를 건네고 있으며 자신의 자리를 물려 주려하고 있다....영화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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