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완득이> <오빠 생각> <증인> 그리고 이번 <달짝지근해: 7510>까지 이한 감독만큼 뚜렷한 인장을 지닌 이가 있을까!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를 소소하면서도 일상에 밀착해 비범하게 풀어내는 데 일가견을 지닌 감독. 처음 도전한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그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힐링과 휴머니즘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인가 식상하고 진부해진 현실에서, 웃음 두 스푼 따뜻함 한 스푼을 근사하게 길어냈다. <달짝지근해: 7510>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바람’에서 출발했다는 이한 감독을 만났다. 재미 더하기 약간의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1차 목표라는 말에서 그 따뜻함의 진원을 찾았다.
실관람객 평가가 아주 좋다. 개인적으로 듣고 싶은 평가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기에 ‘그 영화 참 재밌어’ 라는 말을 듣고 싶다. 이번에는 유난히 떨린다. 나를 믿고 지지해 준 분들께 손해 끼치지 않도록 손익분기점만 넘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완득이> <오빠생각> <증인> 등 그간 휴머니즘에 기반한 따뜻한 작품을 선보여 왔는데, 불현듯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까닭은 뭘까. (웃음)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을 터이고 나 또한 마음이 답답하고 앞날의 희망이 없어 보이는 시기가 있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을 수 있는 영화, 그게 코미디든 어떤 장르이든 일단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그냥 웃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게다가 코미디 장르는 처음이라, 한번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일영’역의 김희선 배우에게 꼭 ‘김희선이어야 하는 이유’를 손 편지 두 장에 빼곡하게 써서 전달했다는데 무슨 내용인가.
희선 배우가 시나리오와 캐릭터는 마음에 들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의 영화 작업이라 이 부분에 대해 부담감을 크게 가졌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안심시켜 주는 내용이 주였다. 희선 배우의 밞음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등등 영화 작업의 두려움을 덜어주려고 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유해진-김희선 배우는 언뜻 떠오르는 조합은 아니다. (웃음) 두 배우가 빚어낼 어떤 그림에 꽂혔을까.
두 분이 함께할 그림보다 각각을 놓고 봤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유해진 배우는 평범한 보통 사람의 희로애락을 잘 연기하는, 몇 안 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희선 배우는 나뿐만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본 사람들이 다들 딱 희선 배우가 떠오른다고 하더라. 드라마나 예능, 인터뷰 등을 보면 굉장히 밝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모습이 ‘일영’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정우성, 염혜란, 임시완, 고아성 배우까지 카메오 출연진이 쟁쟁하다. 그간 같이 작업한 배우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만 봐도 평소의 인품이 짐작된다. 한마디로 잘 살아온 분! (웃음)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면 좀 들려달라.
사실 카메오라고 불리는 특별 출연을 평소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여러분을 모시게 됐다. 그렇다고 아무 역할이나 제안 드린 건 아니다. 평소 나는 알지만, 대중은 잘 모르고 그래서 보여드리고 싶은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몇 분은 거절하지 않을까 했는데 모두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살짝 당황하기도 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정우성 배우의 경우, 그 첫마디가 정확히 기억난다. “감독님, 제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요” 하면서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고, 유해진-김희선 배우가 아주 잘 어울리겠다고 하더라. 이번에 정우성 감독의 첫 연출작 <보호자>와 같은 시기에 개봉하게 되어 ‘어쩌다 우리가 같은 날 개봉하는 운명이 됐을까요’ 하며 서로 응원하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또 영화 시사회에 몰래 참석했다고, 아주 재미있게 봤다고 하더라.
임시완 배우의 세레나데 씬은 특히 좋았다. 임 배우의 미모가 말 그대로 눈부신 데다 오랜만에 노래까지 불러서! 팬들에겐 선물 같은 장면이 아닐까 한다.
시완 배우는 본래 가수이기도 하지만, 노래 부르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꾸준히 작곡하는 등 음악에 대한 욕심이 크고, 또 진지함 속에 엉뚱함이 있다. 관객에게 이런 부분을 보여주면 좋겠더라. 아성 배우는 평소 그 모습 자체로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분이다. 그리고 눈으로 감정 표현하는 연기가 탁월하다. 대사가 적지만, 짧은 시간 안에 멋진 연기를 해낼 거로 생각했고 역시나였다. (웃음)
일영-치호가 주로 외식하는 김밥천국에서 나누는 대화를 비롯해 아재개그의 성공 타율이 높다. 원래도 이렇게 아재개그가 많았나. 이병헌 감독의 시나리오를 각색했는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재개그는 나와 이병한 감독의 역할이 반반 정도인 것 같다. (웃음) 이병헌 감독이 작가로 갓 등단할 무렵의 시나리오로 대략 10년도 넘은 글이라 요즘 흐름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시대 상황도 그렇고 리얼리티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도 있어서, 최대한 충돌하지 않게 각색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감포인트와 어떤 페이소스를 전하고 싶었고, 이 부분을 각색 과정에서 추가했다.
키스하는 두 주인공을 줌인하지 않고 오히려 줌아웃하며 주변의 풍경을 담은 마지막 무렵의 씬이 기억에 남는다. 언덕길과 다닥다닥 붙은 간판 등 생활미 물씬 풍기는 구도심의 풍경이 정겹더라.
영화 <완득이>를 찍었던 동네로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한다. 무엇보다 이런 보통 동네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 두 인물을 클로즈업하지 않은 건, 사실 키스씬은 원래 예정에 없던 씬이었다. 전날 그래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촬영 날 아침에 두 분께 제안 드려 찍은 급조(?)한 장면이다. 두 사람의 아이 같고 순수한 사랑이 약간은 육체적으로 변질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일부러 줌인하지 않았다.
후반부, 과자의 유해성 관련 토론회에 참석한 치호의 ‘왜 찬성 아니면 반대냐고, 꼭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야 하냐’는 말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 장면은 촬영 보름 전까지 수정하고 또 수정한 부분이었다. 생각해 둔 기조는 있었지만, 어떻게 해도 마음에 안 들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코미디적인 요소나 로맨스, 아니면 언급한 토론하는 장면 등 관객에 따라 선호하는 지점이 다를 수 있을 것이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담았다. 지금까지 작업하면서 주인공만이 할 수 있는 대사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꼭 거창한 메시지나 의미는 아니라도 말이다. 보통 사람이 이야기하면 굉장히 작위적이고 주입식으로 느껴지겠지만, 치호의 입으로 전달한다면 진정성 있게 다가가 많은 분이 공감하지 않을까 했다.
유해진 배우는 우효 가수의 ‘민들레’를 OST로 사용하지 않아서 크게 아쉬웠다고 하더라. 치호의 심정과 잘 어울리는 가사라 적극 추천했는데 감독님이 컷했다고, 이유가 뭘까. (웃음)
그간 만든 영화 중에서 이번에 음악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전체적인 컨셉에 맞추기보다 장면의 목적에 따라 씬바이씬으로 어울리도록 선곡했다. ‘민들레’는 정말 좋은 노래이고, 나 역시 평소 좋아하는 곡이다. (웃음) 또 영화에도 잘 어울리지만, 배우의 감정을 뺏을 수 있다고 다시 말해 노래가 너무 앞서 나갈 수 있겠더라.
일영을 ‘미혼모’라는 이유로 가볍게 여기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을 어떤 형태로든 즉각적으로 응징(?)하는 모습이 보인다. 높아진 성인지감수성에 부합되는 한편 미혼모를 향한 편견없는 시선이 읽힌다. 평소 연출 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는 건가.
굉장히 고민하는 부분이고, 항상 여성 스탭들에게 물어본다. 남자 입장에서 보면 불편하지 않은데 여성들이 보면 어떨지 매번 질문하면서 적정선을 찾아간다. 당연히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빌런 다운 빌런은 등장하지 않는다. 치호의 형 ‘석호’(차인표)조차 등장은 악당 같았는데 이내 자기 잘못을 뉘우치니 말이다. 인물에 대한 한결같은 따뜻한 시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웃음)
어렸을 때부터 한국영화를 좋아했었다. 임권택, 배창호, 박광수, 이장호 감독님 등의 공통점을 보면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던 것 같다. 이 영화들이 전하는 ‘좋은’ 기분 덕분에 아마도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불어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살면서 ‘나쁜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당시에는 나빠 보였던 사람도 시간이 흐르고 보면 다 이유가 있고 수긍되더라. 정말 악인, 뼛속까지 악마 같은 사람을 겪지 않은 내 경험이 투영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제일 힘든 부분이 사람을 나쁘게 그려야 할 때다. 예를 들면 폭력이나 싸움 같은 장면은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넣지만, 표현하기 어렵고 힘들다.
유해진 배우는 치호와 당신이 ‘순수함’이라는 면에서 닮았다고 하던데 그런가. (웃음)
해진 배우는,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치호와 닮은 면이 있다. 치호는 세상물정 모르고 순수할 뿐 아니라 매우 확고한 생각의 소유자다. 주변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가치관이 있다. 이런 면이 유 배우와 닮았다. 나와 치호는, 한 번도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눈치가 좀 없는 것? 뭐 이런 점이 닮은 것도 같다. (웃음)
코미디는 연기나 연출, 모두 어렵기로 손꼽히는 장르가 아닌가 한다. 해보니 어떻든가. 함께한 배우진은 이구동성으로 행복한 현장이었다고 하던데.
일단 재미있었다. 또 코미디의 분위기에 있다 보니 어느 순간 ‘아’ 하면서 웃음에 감이 오더라. 성장하는 그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현장이 웃기고 즐겁고 좋았지만, 당시에는 ‘행복’까지는 잘 몰랐었다. 말했다시피 눈치가 없는 편이라… 그런데 후반 작업하며 정말 행복했다는 걸 알았다. 배우진은 물론 미술팀, 촬영팀, 분장팀 등 모든 스탭들이 지치지 않고 한마음으로 함께해 줘서 감사할 뿐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그간 작품을 만들며 고수해 온 철칙이 있다면.
철칙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현장에서 쭉 견지해 온 건 있다. ‘열두 살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거야?’ 이 말을 현장에서 제일 많이 물어본다. 이들에게 통하면 다른 연령대에서도 통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높은 연령대는 유치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 영화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편이다. 경험상 그 시기에 책, 음악, 미술, 영화 등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더라. 그래서 이들 어린 친구들에게 재미있고, 의미도 좀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늘 1차 목표다. 또 촬영할 때 동선 외에는 미리 디렉션하지 않는 편이다. 중요한 동선은 미리 언급하고 들어가지만, 언제부터인가 감정에 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게 됐다. 틀에 가두면 새로운 연기가 나오지 않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캐릭터와 연기에 대해 제일 많이 생각하고 고민할 사람은 배우라서 그렇다. 연기에 있어서는 절대 먼저 언급하지 않고, 물어보면 의견을 전하는 편이다.
사진제공. ㈜마인드마크
2023년 8월 28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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