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
<수리남>이 공개와 동시에 국내 넷플릭스 차트 1위에 올랐다.
플랫폼의 힘을 확실히 느낀다. 작품이 공개된 이후 초등학교 동창부터 내 담당 보험사 직원까지 가장 많이 연락이 왔다. (웃음)
처음 하정우 배우가 연출을 부탁했을 때 고사했다고 들었다.
<군도: 민란의 시대>(2014)가 끝난 후 퍼펙트 스톰 강명찬 대표와 하정우 배우가 ‘같이 영화로 만들어보자’면서 실제 인물의 녹취록 자료를 보여준 적이 있다. 범죄물을 한 지가 얼마 안 돼서 또 그런 영화를 만들기가 좀 그렇더라. (웃음) <공작>(2018)이 나오고 나서도 아직 마땅한 감독을 못 찾았는지 하정우 배우가 또 얘기를 꺼내더라. 그 때 주변에서 (<수리남>은)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서 많이들 권했다.
한편으론 감독으로서의 욕심을 내려두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개인적인 취향은 미니멀하고 리얼리즘이 중시되는 영화다. 그리고 <공작>은 액션 없이 대사로만 긴장감을 주는 근사한 첩보전을 만들고 싶었던 내 개인적인 욕심이 반영된 작품이었다. 그런데 관객이 원하는 건 다른 거 같더라. <공작>을 찍고 나서 주변으로부터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같은 영화는 또 언제 하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대중이 내게서 원하는 게 범죄물이구나 싶어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화가 아닌 6부작 시리즈로 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영화로 만들면 차별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8부작으로 기획했는데 곁가지 이야기들을 쳐내다 보니 6부작으로 완성됐다.
촬영 분량이 많아서 정말 힘들었다. 촬영 분량으로 따지면 영화보다 1.5배 많은데 매일 촬영하다 보니 힘에 부치더라. 할리우드에서 한 감독이 시리즈 전편을 연출 안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건 불가능의 영역이다. 다시는 못 할 거 같다. (웃음)
각색을 하면서 어디에 주안을 뒀나.
실제 사건에선 ‘강인구’의 모델인 실존 인물 K 씨가 수리남의 한 명망 있는 사업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그게 바로 ‘전요환’의 모델이 된 조봉행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어떻게 함께 지내는 사람이 마약왕인지도 모르고 살 수 있나. 그런 얘기가 영화로 나오면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나아가 주인공이 멍청해 보일 것도 같았다. 어떻게 하면 마약왕에게 속은 게 가장 극적으로 보일까 고민을 했고, 직업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건 종교라고 생각했다. 그 부분이 제일 풀기 어려웠다.
K 씨와도 직접 만났다고.
세 번 정도 만났는데 군인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생존이 가능할 것 같은 이미지다. 처음 녹취록만 봤을 땐 '이 사람은 무슨 깡으로 3년 동안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했을까' 의아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납득이 됐다. (웃음) 그런데 그 인물을 연기하는 게 하정우이지 않나. 하정우 배우가 입만 닫고 있으면 굉장히 과묵하고 거친 이미지가 있는데, 영화를 실화대로 찍으면 거친 군인 영화처럼 보일 것 같았다. K 씨의 본질은 바꾸지 않되, ‘강인구’를 조금 능글맞게 그리려고 했다.
첫 시리즈인 동시에 넷플릭스와도 첫 작업인데.
넷플릭스가 창작자의 자유를 존중하긴 하지만, 간섭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넷플릭스에서 가장 강조한 게 시리즈는 엔딩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다음 화를 어떻게 궁금하게 만들지, 메인 플롯 외에 시청자들에게 어떤 재미를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남미가 배경인 만큼 미술과 로케이션 물색도 중요했다.
사실 넷플릭스보다 코로나 때문에 못한 게 많다. 당초 해외 로케 비중이 절반 이상이었는데 코로나로인해 불가능해졌다. 촬영 들어가기 2~3달 전엔 출국이 가능한지조차 불투명했다. 그런 부분이 많이 힘들었다. 해외 배우들도 입국하기 어려워졌고, 촬영 외에도 격리 기간 때문에 바쁜 배우들은 출연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장첸 배우에게 너무 감사하다.
장첸 배우는 어떻게 섭외하게 됐나.
<공작> 대만 촬영 때 현지 PD가 장첸 배우와 친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에게 내 얘기를 좀 해달라고 했더니, 장첸 배우가 내 영화를 좋아한다더라. (웃음) <수리남>을 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배우가 장첸이었다. 에이전시를 통해 섭외를 시도했는데, 언어도 잘 통하지 않고 의사 소통 단계가 많아서 소통이 잘 안 됐다. 결국 코로나 터지기 직전에 대만에 찾아가 장첸 배우를 직접 만났다. 그에게 ‘당신이 하기에 큰 역할도 아니고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다. 당신을 사랑하고 좋아한다. 꼭 출연해달라’고 부탁했다. (웃음)
코로나로 인해 해외 로케도 쉽지 않았다고 밝혔는데, 그래서 제주도에서 촬영한 분량이 많다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해결책을 찾던 중 가족들과 제주도에 갔다가 ‘전요환’의 저택으로 쓸 만한 곳을 발견했다. 실제로 야자수를 심기도 했지만 CG를 엄청 사용했다. (웃음) 해외 촬영을 할 때 다른 점은 <오징어 게임> 이후여서 박해수 배우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더라. 촬영 협조에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웃음)
박해수 배우와 작업하는 건 어땠나.
박해수 씨는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과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 봤는데 얼굴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다. 고전영화에 나오는 느낌이라고 할까.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담백하고 맑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박해수 씨는 본인이 지닌 그런 느낌을 가진 배역을 맡아본 적 없었던 거 같았다. 그래서 깔끔하고 담백하고 선한 인상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함께한 다른 배우들도 좋았다. 유연석 씨는 뮤지컬 <헤드윅>을 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조우진 씨는 <보안관>(2017)과 <공조>를(윤종빈 이랑 같이 한 작품?) 같이 해서 어떤 역할을 맡겨도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배우들을 논하면서 하정우 배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두 사람의 인연이 대학 시절부터 상당히 오래되지 않았나.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하정우 씨는 다른 감독들보다 내가 더 잘 아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그를 제일 잘 끌어내는 감독인지는 모르겠다. 오랜 기간 봐왔지만 예전엔 유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대학 때와 비슷한 것 같다? (웃음) 하정우 씨의 가장 큰 특징은 매 테이크마다 연기가 다르고 1번, 2번 테이크가 가장 좋다는 거다. 많이 시키면 안 된다. (웃음) 그래서 최대한 리허설 없이 가자는 생각이다. 변신이 쉬운 배우라는 것도 장점이다. 게다가 나는 리얼리즘이 주가 되는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 역시 비슷하다. 배우로서도 좋은 배우고 마음이 잘 맞다 보니 계속해서 함께 일하게 되는 거 같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오징어 게임>이 얼마 전 미국 에미상을 수상했다. <수리남> 역시 해외 어워드에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여하간, 황동혁 감독님 정말 축하드린다. (웃음) <오징어 게임>이나 영화 <기생충>(2019) 같은 작품 덕분에 한국 창작자들에게 더 다양한 기회가 올 것 같다.
드라마로 에미상 진출, 영화로 아카데미 진출 중에 선택한다면.
올드한 대답일지 모르겠지만 극장용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내 작품이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게 좋다. 내가 오랜 시간 영화를 공부하고 만들어온 사람인지라 계속해서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하지만 <수리남>을 보고 전 세계가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면 또 시리즈에 도전할 수는 있을 거 같다. (웃음)
사진제공_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