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 박은영 기자]
‘숙희’(<아가씨>, 2016)로 화려하게 등장하며 관심을 모았던 김태리가 1987년 6월 아픈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서서 다시 관객을 찾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며 학생 운동에 회의적이었던 극 중 87학번 새내기 ‘연희’와 구태를 답습하는 사회에 비관적이었던 08학번 ‘김태리’는 닮은꼴이다. 그녀는 작년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과연 이 사회가 변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1987>을 통해 뜨겁고 뜨거웠던 국민을 만나며 의심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불의에 맞서 변혁을 일구어 낸, 시대를 관통하는 정의를 목도한 김태리. 마침내 ‘연희’가 연단 위에 올라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친 것처럼 이제는 희망을 말한다.
(해당 인터뷰는 <1987> 관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87>을 준비하면서 현대사 관련 공부를 많이 했을 거 같다.
관련 도서를 읽고 큰 흐름과 개요를 파악했다. 그 후 비슷한 소재의 전작들을 여러 편 접했고 함께 작업한 선배님들과 많은 얘길 나눴다.
준비하면서 받은 느낌은.
참담했다.
영화 속 유일한 허구 인물인 ‘연희’를 연기했다. 실존 인물과 달리 참고할 자료가 없는데 준비는 어떻게 했나.
허구의 인물이라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했다. 특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장준환 감독님과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감독님께서 ‘연희’의 이미지를 상당 부분 구축한 거 같다.
장준환 감독님과 나눈 대화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음....지금 자세히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감독님께서 나에게서 정신력이 강하고 단단함, 그런 게 느껴진다고 하셨다. 그런 면을 잘 살려 연기하면 좋을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연희’에 관해 소개한다면.
‘연희’는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주관을 가진, 무엇이 위험한지 잘 아는 인물이다. 극 중 연희가 87학번 신입생이지만 한편으론 요즘 세대와도 닮았다. 그녀는 삼촌(유해진 분)과 주변인들의 싸움이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결국 싸워서 다치고 상처를 받는 건 가족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광주 비디오를 보거나 같이 싸우자고 하는 학우로 인해 갈등을 겪지만, 고집을 꺾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결국엔 싸우게 되는, 각성하는 인물이다.
‘연희’와 실제 닮은 점이 있다면.
음... 깡다구?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물론 난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웃음) 그녀는 어떤 상황이라도 자기 신념을 지키는 편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몇 학번인가. 신입생 때 고민은 무엇이었나.
08학번이다.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정치, 사회 문제보다는 좀 가볍지 않았을까. 신입생 때는 세상 모든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고 어디에도 구속되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기자간담회 당시 ‘비관적인 생각’을 했었는데, <1987> 참여 후 바뀌었다고 말했다. 무엇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인가.
음....그건 사회가 안 좋은 방향으로 계속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이유는.
매체를 통해 안 좋은 소식을 계속 접하고, 역사를 공부해보니 한숨이 나왔다. 구태가 답습된다고 할까. ‘나아지지 않을 거다, 저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계속 국민을 분열시킬 거다’ 이런 생각이 강했던 거 같다. 사실 작년에 촛불집회에 나가면서도 권력층은 변화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1987>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얻은 현재인지 절감했다. 국민의 뜨거운 힘을 깨달았고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했음에도 광장에 나갔다!
음....말하기 조심스러운데 ‘뭔가를 바꾸겠다’ 이런 마음보다는 자기만족이 강했던 거 같다. 일도 없는데 안 나가면 스스로한테 죄책감이 들겠더라. 특별한 용기나 사명감을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다. 일단 내가 나가서 직접 겪어보고자 했다.
결국 <1987>를 통해 우리 사회를 향한 믿음이 생긴 거다.
맞다. 나라가 엉망이 되더라도 그걸 극복할 힘이 우리한테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전에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중 우리 사회가 계속 디스토피아일 거라고 생각했다. 좀 전에 말했듯 촛불집회에 나갔지만 나가면서도 한편에서는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1987>을 하면서 실제 변화를 목격한 거다.
<1987>에 출연하는 배우 중 가장 젊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젊은 세대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데 공감하리라 생각하나.
당연하다. 작년 광화문 광장에 많은 국민이 나왔다. 그때 어른들만 앞장서고 앞에 나가 연설한 게 아니다. 중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도 자기주장을 펼쳤고, 아주 어린 자녀와 손잡고 나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는 부모님도 많이 계셨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세대의 벽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87>을 보신(실) 관객 중 실제로 그 시대를 겪은 분도 계실 거고 아닌 분도 많을 거다. 1987년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내가 이렇게 마음이 울리는데 다른 분도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87학번 신입생을 연기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풋풋한 느낌을 주려 했다. 특히 친구와 얘기할 때 장난기 어린 새내기의 모습이 나오는데 자연스럽게 살리고 싶었다.
강동원이 극 중 ‘연희’의 각성을 재촉하는 선배로 나온다. 호흡은 어땠나.
처음 만났을 때는 좀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촬영하니 그렇지 않았다. <1987> 관련 얘기를 자주 들려줬는데 정말 준비를 많이 하셨더라. 또, 광주에 내려가서 이한열 열사 가족도 직접 만났다고 하시더라. 박종철 열사를 연기한 여진구 배우도 그랬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극 중 만화동아리에서 ‘광주 5.18 민주항쟁’ 영상을 틀어주는데 연희가 보지 않고 나가는 장면이 있다. 그 영상을 실제 봤는지?
촬영 전에 미리 봤다. 이후 광주를 소재로 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관련 팟캐스트도 들었다.
‘연희’가 선배(강동원 분)의 부고를 신문에서 접하고도 바로 학생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 연희가 각성하는 시기가 언제라고 생각하나.
아마, 선배의 부고를 신문에서 보는 순간에도 각성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때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상태 그러니까 뭔가를 해야 하는 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각성이라고 말하기는 모호하다. 이후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연희 안의 억눌러왔던 뭔가가 터지고 결국 연단에 오르는 거라고 본다.
촬영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감정을 쏟아내는 신들이 어려웠다. 실제로 내가 그 감정에 동화되어야 연기가 나오기에 감정 이입하려고 노력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엔딩 장면이다. 내가 나와서가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먹먹했다. 관객이 그 장면을 보고 어떻게 느낄지가 궁금하다.
전작 <아가씨>로 워낙 화제의 중심에 섰고 여러 상을 받기도 했다. 후속작에 대한 부담이 상당했을 거 같다.
<아가씨>를 막 끝냈을 무렵에는 부담감? 이런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력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기에 부족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다. 부족한 부분은 작품을 계속하면서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관객과 만난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되더라. 촬영장에 나가면 어떻게 ‘연희’가 될지 순간순간에 집중했는데, 촬영이 비는 시간에 찾아오는 불안감이 있었다.
<아가씨> 이후 인지도 자체가 높아졌는데 변화를 체감했나.
<1987> 캐스팅 제의를 받았을 때, 사실 조금 허탈한 기분이었다. 너무 기쁜 한편으론 ‘이렇게 쉽게 선택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7>이 <아가씨> 이후 관객과 만나는 첫 작품인데 바람이 있다면.
음, 많은 분이 와서 봐주셨으면 한다. 감독님 말씀처럼 부모님이 자녀와 함께 오셨으면 좋겠다.
릴렉스? 긴장을 푸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면.
준비를 충분히 하려고 한다. 그래야 당황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번 인터뷰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뭔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고 생각하며 인터뷰했는데 찬찬히 돌이켜보니 욕먹기 싫어서 미리 선수쳐서 얘기한 부분이 어느 정도 있는 거 같다. ‘잘 했다, 못했다’ 이런 칭찬이나 비난에 나름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던 거지! 비난을 피하고자 무의식적으로 방어를 친 듯하다.
스스로 깨은 게 대단하다.(웃음) 신인임에도 위축되지 않는 당당한 이미지인데 원래 성격은 어떤 편인가.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고 극단 생활을 해서인지 나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편이다. 일단 위축돼 있으면 내가 힘들기에 편하게 대하려 하는데 그런 행동이 당당함으로 보이나 보다.
데뷔하기 전에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이런저런 사회생활을 했는데 다양한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평소 최대한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시상식 같은 자리가 너무 어렵다. 앞으로를 대비? 해서 성격을 바꿔야 할 거 같기도.(웃음) 사실 데뷔 전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번에는 <리틀 포레스트>로 만나는 건가.(웃음) 일본 영화 리메이크작인데 원작처럼 두 편으로 나뉘어 있나.
이제 촬영이 끝났고 후반 작업 중이다. 원작은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 이렇게 두 계절을 한 편씩 해서 총 두 편이고, 우린 4계절을 한 번에 담았는데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는 거 같다. 일본영화가 계절에 푹 젖는다면 우리는 좀 빨리 지나가지만, 4계절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다.
<리틀 포레스트>는 아날로그 감성이 풍부한 작품인데 스스로는 어떤가.
글쎄, 나 스스로가 아날로그 감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데 좀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할까.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아직 잘 모르겠다.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아마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작품에 내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내 성격과 반대라도 도전할 거 같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음....지금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스스로한테 집중하고 싶다. 내가 즐거워야 좋은 연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앞으로 재미있는 현장, 또래 배우들과 다양한 작품을 하고 싶다.
요즘 인상적인 일이나 행복했던 일이 있다면.
음, 원래 고양이를 키웠는데 이번에 길냥이를 들여서 지금 2마리를 키우고 있다. 보고만 있어도 너무 귀엽고, 고양이도 사람처럼 성격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2017년 12월 29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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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박광희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