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 박은영 기자]
<타짜>의 ‘아귀’, <황해>의 ‘면정학’, 유난히 독한 악역을 잘 소화하는 배우 김윤석. 그가 작정하고 국민의 공분을 사려 한다. 바로 <1987>에서 악의 축 안타고니스트 ‘박처장’으로 분해 암울하고 공포로 물들었던 독재 시대의 정치, 사회 모습을 고발한다. 김윤석은 1987년 6월 항쟁을 중점적으로 이끌었던 지금의 40~50대는 물론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2030 세대에게도 <1987>은 강한 울림을 전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1980년의 광주, 1987년의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광장에 모였던 수많은 촛불까지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왔기에, <1987>이 연령과 세대와 상관없이 소구하리라 믿는다.
(해당 인터뷰는 <1987> 관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사 후 반응이 뜨거웠다. 훌쩍이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더라. 작품의 여운에서 좀 벗어났나.
어제 기자 시사를 하고 그다음 날부터 바로 인터뷰하는 중이라 정신을 추스를 시간이 없었다. 일단 영화에 대한 평은 좋은 거 같아서 안심이다. 눈물을 보인 분이 많다는 건 그만큼 공감했다는 거니까 고맙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현 50대와 열사 가족분과 관계자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려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다행이다. 개봉 후 일반 관객의 반응이 궁금하고 설레기도 한다.
극 중 실명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다. 당신이 연기한 ‘박처장’ 관련 자료 조사를 많이 했을 거 같다.
백방으로 자료를 찾으려 애썼는데 원래 없는 건지 아니면 삭제한 건지 모르겠지만 대공처 관련 자료가 별로 없었다. 자료가 없다는 건 그만큼 베일에 싸여 있었던 조직이었다는 반증이라 생각한다.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이후 그나마 수면으로 드러난 거다. 예전 관련 기사 사진과 인터뷰를 어렵게 구해서 참고했다. 또, 블로그 등의 자료도 참조하고 조합하여 감독님과 상의해서 스토리를 구성했다.
극 중 ‘박처장’은 현재 생존하는지.
아니다.
<1987>에 참여한 계기는.
장준환 감독님과 <화이>(2013)를 같이 했고 원체 친분이 깊다. 이번 시나리오는 감독님이 처음부터 쓴 게 아니라 김경찬 작가(<카트> 각본, 2015)가 쓴 거를 감독님이 사건과 사건을 모아 연결한 거다. 등장인물 스케치 단계에서 나에게 제안을 주셨다. 안타고니스트를 가운데 두고 그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보이는 형식인데 그 중심을 맡아줬으면 한다고 말이다.
<1987>을 시작할 당시는 지금과 같은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 작품에 합류하면서 개인적 부담감은 없었는지.
솔직히 작년 이 영화를 시작할 때 이런 시대가 올지 몰랐다. 장미 대선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1987>을 접하고 처음 든 생각은 과연 투자할 사람이 있을까 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완성도라고 생각했다. 유가족이나 관련자분께 누가 되면 안 되니 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가지고 컴플레인을 건다면 그 사람들(정치권)이 어리석은 게 아닐까. 그렇기에 참여 결정하면서 개인적 부담감은 별로 없었다.
지금까지 <타짜>(2006)의 ‘아귀’, <황해>(2010)의 ‘면정학’ 등 악역을 했지만, 이번 ‘박처장’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어떻게 해도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지독한 인물이다.
그 말 그대로 픽션의 악역은 개성 있는 악역이다. 그래서 ‘한 번 놀아보자’ 이런 마음으로 실컷 연기하면 된다. 그런데 이번 ‘박처장’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1987>은 무엇보다 이야기 구조가 흥미로웠다.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적대 인물)를 가운데 두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이 모인다. 영화적으로 아주 영리한 구성이다.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주동 인물)를 중심으로 했으면 구심점이 흔들렸을 거다. 물론 ‘박처장’을 연기하는 것에 어느 정도 부담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 주안점은 ‘박처장’이라는 개인의 악행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권력 조직의 상징인 ‘그’(박처장)를 통해 당시 얽히고설킨 사회 문제, 폭력적인 독재 정치 등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거였다.
극 중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기자 회견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 불과 30년 전 일인데 얼마나 낯선 풍경인지 모른다. 모두 담배 피우며 인터뷰하지 않나. 심지어 기자들도 피고! 촬영하면서 너무 황당하고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오더라. ‘탁 치니까 억’은 당시 유행어였다. 연기하는데 하도 어이없어서 매끄럽게 말을 연결하지 못하겠더라. 그러다 보니 동의를 구하듯이 마치 내 말을 믿어라 이런 어투가 됐다.
극 중 ‘받들겠습니다’ 이 대사가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더라.
솔직히 촬영하면서 말하는 박희순도 듣는 나도 웃었다. 당시의 절대적 수직 구조에서 파생된 희한한 말인 거다. 그런 단어 하나, 말 한마디가 다 시대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고 본다. 웃기려고 한 게 아니라 실제로 다 사용했던 단어들인데 현재에서 바라보니 더 웃긴 거지.
‘박처장’이 힘이 들어간 장면이 많은데 특별히 어려운 장면을 꼽는다면.
유사 소재의 다른 작품처럼 적나라하지는 않지만, 우리 영화에도 남영동 고문실이 나온다. 고문하는 장면이나 고문실 풍경이 자세하게 나오지 않음에도 그 자체만으로 그러니까 세트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힘들더라. 벗어나고 싶었다. 정말 존재하면 안 되는 장소 아닌가!
이번에도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참 자연스러웠다.
사투리 연기를 해야 할 때는 항상 그 지방 선생님을 만나서 사사받고 녹음하면서 연습한다. 언어를 새로 배울 때는 연습밖에 없다. 남한 표준어가 서울에 사는 중산층이 쓰는 말....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의가 있는 거처럼 이번 평남 사투리는 북한에서는 표준어에 가깝다고 하더라. 정제돼있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특출나게 두드러지지 않게 구사하려 했다. 왜냐면 그는 1950년대 월남해서 30년간 서울에 산 사람이니 말이다.
‘박처장’의 외양이 예사롭지 않다. 남영동의 절대자이자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존 인물이 상당한 거구였고, 당시 지위가 좀 있는 사람들은 올백 머리를 많이 했기에 엠자 머리 스타일을 했다. 또, 권력욕과 고집있는 입매를 위해 하관 쪽을 부각시켰고, 몸통을 두껍게 보이기 위해 패드를 착용했다.
<1987>이 당시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소구할 수 있는 지점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1987년이 먼 과거가 아니고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이와 유사한 게 작년의 촛불시위라고 생각한다. 당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왔듯이 이번에도 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였다. 그때의 대학생이 이제는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어 자녀의 손을 잡고 나와줬다. 개인적으로 1980년의 광주, 1987년, 그리고 촛불집회는 다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1987년을 경험하지 않았던 젊은 세대든 그때를 직접 체험했던 현 40~50대든 연령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남한산성> 이후 아픈 역사를 다룬 작품에 연속적으로 참여했는데 평소 역사에 관심 있는 편인가. 실화가 부담스럽지 않나.
부담감보다는 실제 얘기를 할 때는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곡될 수 있으니까. 올해 역사를 다룬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이것도 하나의 흐름인 거 같다. 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가고 있는 거고. (웃음)
1987년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어떤 모습이었나.
그냥 아주 촌스러운 모습이었다. 당시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열심히 연극을 했었다.
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후배라고 들었다. 평소 친분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당시, 나는 1학년이고 열사는 3학년으로 까마득한 선배였다. 내가 감히? 친해질 위치가 아닌 거지.
<추격자>(2008), <황해>(2010)에 이어 하정우와 세 번째 호흡이다.
하정우가 ‘최검사’ 역을 맡아 너무 좋았다. 나, 하정우, 강동원은 처음부터 만나서 이 영화를 하자로 의견을 모았었다. 이번에 하정우는 자기 역을 너무 잘해준 게 영화 초반 활력을 확 실어준다. 정우와는 작품으로는 7년 만에 함께 하는 거지만 실제는 자주 만나서 술을 마시는 사이라 아주 재미있게 촬영했다. 이번에 오랜만에 함께 했는데 좀 더 넓게 영화를 보고 한층 성숙해졌더라. 자기의 역할만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눈이 깊어졌다고 느꼈다.
전반부는 ‘최검사’역의 하정우가 활력을 실어 줬다면 후반부는 강동원이 먹먹하게 마무리한다.
강동원이 김태리와 종로에서 백골단을 피해 쫓기고 도망가는 모습을 봤는데 키 큰 친구가 좁은 골목을 뛰니 안 부딪칠 수가 없어서 고생했겠더라. 특히 마지막 연대 앞 시위 장면은 정말 더운 날 촬영을 했다. 정경 역할을 하는 친구들은 옷을 입어야 해서 주위에 냉동차 동원하고 포도당과 소금, 응급차 등이 다 대기했었다. 정말 고생해서 찍었고 우여곡절이 많은 장면이었다.
관객으로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장면. ‘연희’(김태리 분)가 좁은 골목을 뛰어가다가 좀 더 넓은 길로 나가자 점차 사람들이 모여든다. 결국, 그녀가 담을 타고 위로 올라가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는 문소리의 목소리다. 그녀가 원체 학교 다닐 때 한 운동? 했던 사람이라 구호나 팔 동작 등을 자세하게 가르쳐 줬다.
<1987>의 영화적 재미 포인트는.
음....<레미제라블>(2012)을 보면 메시지에 눌리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나. 비슷하지 않을까.
<1987>을 보고 여러 감정을 느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다가온 건 ‘누군가의 수많은 희생으로 쟁취한 자유와 민주주의임을 잊지 말고 소모적인 갈등을 종식하고 소중히 지켜나가야 한다’는 거다. 예비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일 단순한 건 지난해 ‘촛불’을 기억하면 된다. 아까 말했듯 1987을 이끌었던 기성세대와 2030 세대 나아가 10대까지 광장으로 나갔고 힘을 합했다. 그 마음 그대로 지켜서 세대 갈등과 지역 갈등 등에 힘 빼지 말았으면 한다. 함께 가자는 마음으로 모든 연령이 함께 봤으면 좋겠다.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극 중뿐 아니라 촬영 현장에서도 구심점이었을 거 같다.
뭐, 누구 한 명이 중심이 아니었다. 우리 현장은 음.... 쇼트트랙 같다고 할까. 진짜 쇼트트랙 경기하는 것처럼 서로 밀어주고, 밀어주고 했다. 만나면 자신이 참여하지 않았던 촬영 장면에 대해서 항상 얘기하느라 바쁘고 처음부터 끝까지 화기애애했던 거 같다.
<1987>을 마친 소감은.
감독님한테 모든 공을 돌리고 싶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서 여진구와 강동원의 이름이 먼저 올라가는 거에서 알 수 있듯이 세세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지금도 CG 작업하고 계실 거다. 아마 개봉하면 몸살 나서 누우실 듯하다.
우연히? 연말에 한국영화 대작 <강철비>, <신과함께- 죄와 벌> 그리고 <1987> 세 편이 몰렸다.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한국영화 3편이 2017년 대미를 장식하는 건 의미있다고 본다. 2017년 마지막 한국영화로 <1987>이 27일 개봉하고, 또 ‘1987항쟁 30주년’ 인 시점인 것도 의미있다. 진심으로 모두 잘 됐으면 좋겠다.
딸바보라는 명성이 자자한데 <1987>은 자녀분과 함께 관람할 계획이 있는지.
당연하다. 작은아이가 초등 6학년인데 예전에는 ‘애들은 가라’ 이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보여주고 판단하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필모를 보면 영화적 쾌감이 강한 작품과 메시지에 중점을 둔 작품, 작품 사이 균형이 좋다.
좋은 필모를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조절하게 된다. 같은 톤, 비슷한 장르를 연기하면 누가 봐주겠나. 좋은 필모를 보며 나중에 스스로 최선을 다했구나 하고 느끼고 싶다.
감독 데뷔한다는 말이 있다.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정해지면 기쁜 마음으로 공식 인터뷰하겠다. (웃음) 그러니 지금은 아직 아닌 거로. 다만 연극을 할 때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많이 해봤기에 연출이 생소한 작업이 아니다. 단지 스크린이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연극을 하다가 영화판에 와서 처음 깨달은 게 연극과 영화가 별로 다르지 않구나 였다.
<화이>(2013) 이후 오랜만에 ‘여진구’를 만났는데, 정말 반가웠겠다.
<타짜 2>(2014)에서 잠깐 나온다. ‘진구’는 정말 다비드상같이 생겼다. (웃음)
어떤 배우로 남고 싶은가.
어느 인터뷰인가에서 ‘맨몸으로 맨얼굴로, 무기 하나 없이 앞으로 나가는 배우’라고 나를 표현했더라. 그런 표현이 고맙다. 좋은 작품을 피하지 않는 배우이고 싶다.
다음 작품 계획은.
내년에 <암수살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매력적인 스릴러다.
한 해를 정리하는 시기인 만큼 올 한해 가장 기쁜 일이나 인상적인 일을 꼽는다면.
뻔한 대답이지만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1987>로 올해를 끝내고 2018년을 <1987>로 시작한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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