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미녀> 이후, 김태우를 한동안 스크린에서 만나기 갑자기 힘들어졌다. 문득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어김없이 김태우가 어디선가 영화를 찍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짧은 뉴스 한 토막은 그렇게 배우 김태우를 우리 곁에서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위치에 데려다 놓았다. 문소리와 함께 출연한 <사과>가 개봉을 미루게 되면서 덩달아 그와의 만남도 자꾸만 더뎌져갔다. 약간의 조급증이 밀려오던 어느 날, 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은 조용히 김태우를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
3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김영남 감독의 <내 청춘에게 고함>에서 그는 30살이 넘은 말년 병장 김인호로 등장한다. 첫 등장에서부터 사는 게 별로 재미없는 듯, 쫄다구를 괴롭히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에피소드라고 바짝 긴장한 관객을 일순 무장해제 시킨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백이면 백 전부 다, 내가 말 없고 조용한 성격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코미디하라고 한다. 영화 속 김병장하고 성격이 완전 딴판이다”
툭툭 내뱉듯 김태우는 상대의 의중을 살피면 첫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원하는 답변을 해준다. <버스정류장>의 재섭 같은 내성적인 성격일 꺼라 평소 생각해 왔던 기자에게 그의 박력은 순간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낯섦이 돼버린다. 사실, 배우 김태우를 인간 김태우로 맘대로 생각한 기자의 오해는 첫 질문으로 이렇게 완전히 풀린 거다.
자연스레 공통의 관심사인 배우, 영화쪽으로 질문은 가닥을 잡아가고, 편하게 하라면서 음식을 권하는 그의 태도에서 천천히 자신의 직업을 즐길지 아는 사람만의 여유가 보인다.
“<내 청춘에게 고함>으로 관객들에게 바라는 것은 이 영화를 통해 지났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떠올려봤으면 하는 거다. 처음 이 영화 시나리오를 봤을 때, 이게 잘 만들어지면 그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 영화 잘못 보면 뭐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될 수 있어 가지고”
김태우는 분명 알고 있는 듯하다. 요즘 관객이 찾는 상업영화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번 영화는 난해하거나 자칫 잘못하면 지루한 독립영화쯤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김태우는 낙관적이다.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고 다들 어쩌라고? 반문하면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생각들을 관객들이 했다면서 말이다.
“영화에서 김인호병장이 등장하는 첫 장면은 훈련 나갔다가 빠져가지고 그냥 털래털래 먼저 들어오는 씬이거든요.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그 다음으로 장면으로 이해한다 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런 영화는 본인이 해석하는 대로 보면 되거든요. 정말 말 그대로 열린구조의 영화라고 할까나.”
배우나 감독이 의도한 장면에서 관객이 그 표현을 잘못 이해했다면 그건 배우와 감독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김태우는 <내 청춘에게 고함>이 특정의미를 고사하는 영화가 아님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자신감 있는 어투로 상대를 제압하는 듯 보였지만 김태우는 매우 섬세하고 상대의 의중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다.
김태우는 브라운관에서 먼저 대중들에게 얼굴을 익혔다. 늘씬한 키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게 만드는 동안의 외모 그리고 그의 분신처럼 돼버린 안경은 김태우를 부드러운 남자, 여자들이 생각하는 남편감 혹은 이상향으로 이미지 메이킹했다.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드라마, 영화를 대충이라도 훑어보면 그의 이미지가 관객이 원하는 지점과 적정선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여타의 배우들보다 가장 자유로운 방법으로 영화를 선택하고 있고 상업성의 논리에 배우가 함몰되지 않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방법은, 종류가 여러 가지다. 개런티도 봐야 되고, 출연료는 좋은데 작품이 얼토당토 하다면 못하는 거다. 나 같은 경우 작품에 시쳇말로 필이 안 꽂이면 다른 조건이 좋아도 한 적이 없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수긍 간다. 그는 <굳세어라 금순아>, <공동경비구역 JAS> 같은 상업성이 짙은 영화부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사과> 같은 저예산 영화에도 폭넓게 출연하고 있다. 주/조연 안 가리고 작품만 좋다면 출연하는 배우는 아마 한국에서 김태우 밖에 없을 듯. 이미지 탈피는 그래서 김태우에게는 그리 심각한 문제가 못 된다.
“10년 배우했어요. 앞으로 30~40년 더 해야 되는데 깡패 하고 싶다고 억지로 찾아서 깡패 할 필요 없잖아요. 이런 얘기를 했다고 누군가는 건방지다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미지 그리 급하게 생각 안 해요. 좋은 작품 하나하나 쌓다보면 어떤 이미지가 생기기도 하고 바뀌기도 할 테고. 이러다 코미디 연달아 2~3편 하면 아마 코믹이미지로 나를 기억할 거다”
매사에 저토록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김태우에게 영화처럼 청춘의 불안이나 상실감은 정녕 없는 것일까? 오늘 처음 본 기자가 낯설어서 어쩌면 깊은 속내를 얘기 안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가 직업의 한계라는 씁쓸한 기분에 젖어 있을 때.....
“김인호병장을 연기할 때, 그의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하려고 했다. 김병장을 보고 관객이 청춘의 상실, 불안. 희망을 느끼던 간에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려고 한 거다. 나는 내가 육십이 되어도 내 스스로 청춘이라고 나를 느낀다면 그게 청춘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다음 작품이 고민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불안하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일거다.”
그와 나누는 대화만이 존재하는 조용한 까페 안에서, 김태우는 예의 그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배우로서의 씁쓸한 속내를 살짝 들춰낸다. 현재의 삶에 대해 동시에 느끼는 이 씁쓸한 자조감은 막연하게 서로를 느끼던 기자와 배우에게 매끄러운 친밀감을 선사한다. 김태우는 선택을 한 거다. 배우는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이미지가 많이 노출될수록 배우한테는 손해라는 사실을 알고, 좀 더 내면의 자신을 쳐다보는 영화나 시간을 그는 영악하게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내 청춘에게 고함>은 김태우에게 터닝포인트적인 작품은 아니더라도 뭔가 각별한 의미를 지닐 듯싶어 다시 영화에 대한 긴 얘기를 나눴다. <내 청춘에게 고함>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다른 여타의 작품들과 차별되는 부분은 세 주인공이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인물이란 데 있다. 한 때의 청춘을 상징하는 세 명의 남녀가 영화 안에서 관계를 안 맺고 있다는 것은 어떤 알레고리를 기대하던 관객에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실제로 우리 영화의 맨 마지막에 주인공 셋이 만나는 장면이 있다. 보통 영화를 찍다가 빼는 게 좋을 것 같아 중간에 편집을 많이들 한다. 그런데 <내 청춘에게..>는 처음 들어갈 때부터 러닝타임 4시간 나올 것 알고 순서대로 빠짐없이 일단 찍었다. 주인공 셋이 만나는 마지막 장면을 붙여보니깐 안 좋아 그걸 빼고 지금의 버전이 나온 게, 사실 아니다. 난 붙여 논 버전도 봤는데 그걸 뺀 지금 버전이 훨씬 더 고급스럽고 순수하단 느낌이 든다.”
대중에게 ‘배우’ 김태우로 남고 싶은 그의 올곧은 영화관은 자신의 영화를 새삼 그렇게 보듬어 안는다. 몇 편의 (관객기준으로 보자면) 난해한 영화에 출연해 지금은 온화한 먹물이미지로 많이들 김태우를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 <해변의 여인>은 전반부 후반부로 나뉜 영화다. 나는 전반부에 조연으로 출연한다. 그런데 완전 똘아이로 나온다. 기대해도 좋다. 정말 재미있거든(하하)”
연이은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몰려 있는 이때, 그는 자신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나올지 별로 걱정 안하는 눈치다. 김태우의 이미지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대중이 만든 거니 생각해보면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긴 하다. 그러나 홍상수의 조감독 출신인 김영남 감독의 <내 청춘에게 고함>을 많은 이들은 홍상수 스타일이라 평했다. 이에 대해 김태우의 입장은 상반된다.
“<여자의 남자의 미래다> 할 때와 지금 <해변의 여인> 할 때하고 홍상수 감독님 스타일이 완전 다르다. 영화에 깊이 빠져 있다 보면 진행하는 방식은 비슷할지 몰라도 차이점을 확연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영화를 보고 비슷하네? 라고 쉽게 판단 내리는데 <내 청춘에게 고함>은 스타일이 확실히 다른 영화다”
대화도중 인터뷰 내용을 거슬러 꼼꼼히 체크해 부족하단 싶은 부분이 있으면 굳이 다시 돌아가 정갈하게 마무리하는 김태우. 역시 그답다. 평생을 배우로 살고 싶은 청춘, 김태우에게 배우의 입장으로 누군가를 상대해야 하는 일들은 허투루 흘려보낼 만한 개제의 것들이 아니기에.......
글_ 2006년 7월 31일 월요일 | 최경희 기자
사진_ 2006년 7월 31일 월요일 | 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