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항공기 한 대가 뉴욕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했다. 그 날, 미국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그로부터 10년 후. 2011년 5월 1일, 자정에서 30분이 지난 시간. 미국 네이비씰 대원들을 실은 헬리콥터가 파키스탄 항공을 날아 빈라덴의 은신처에 도착했다. 몇 시간 후 오바마 대통령은 “9ㆍ11의 원흉 빈라덴이 네이비씰에 의해 사살됐다”며 “정의가 실현됐다”고 발표했다. 2001년 세계무역센터에서 걸려온 통화 속 실제 음성들에서 시작되는 <제로 다크 서티>는 빈라덴이 2011년 파키스탄의 한 민가에서 발견, 피살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그 중심엔 빈라덴 검거에 10년의 세월을 바친 CIA요원 마야(제시카 차스타인)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CIA에 입사한 마야의 빈라덴과의 ‘악연/인연’은 그녀가 파키스탄으로 파견되면서 시작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빈라덴 검거에 혈안이 돼 가는 마야는 은행 강도질을 즐거운 놀이로 즐기는 <폭퐁 속으로>의 보디(패트릭 스웨이지)와 폭발물 제거라는 위험한 상황에 중독된 <허트 로커> 속 제임스(제레미 레너)의 또 다른 얼굴, 그러니까 캐서린 비글로우가 낳은 또 한명의 분신이다.
마야가 빈라덴에 집착하는 건 투철한 애국심 때문도, 국가의 강요 때문도, 정치적 목적 때문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이다. 동료를 잃고, 폭탄테러에 휘말리고, 총격에 목숨을 위협당하고, 자신의 얼굴이 테러범들에게 노출되는 위험한 일을 겪으며 마야는 지쳐가지만 동시에 대상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다. 전쟁을 대하는 비글로의 시선은 여전하다. 어줍잖은 교훈이나 의식적인 선동을 지양하면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 피상적인 휴머니즘을 설파하기 보다는, 한 인간의 심리에 집중하는 것. 그렇게 비글로우 감독은 정치적 관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흘러간 부조리의 시간들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제로 다크 서티>는 전작 <허트 로커>가 그랬듯, 화끈한 액션보다 스릴에 무게 중심을 둔 영화다. 이러한 스릴감을 소름 쭈뼛 돋게 표현해 낸 대표적인 시퀀스는 마야의 동료가 돈으로 매수(했다고 믿는)한 알 카에다 측 정보원과 현장 교섭하는 부분이다. ‘작전 성공에 대한 기대’와 ‘이 거래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믿음’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관객은 무언가 살벌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빠져든다. 그리고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는 서스펜스는 정보원이라 믿었던 상대(테러범)의 몸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폭탄물이 발견되는 순간, ‘아’ 하는 탄성과 함께 폭발한다.
빈라덴의 은신처를 네이비씰 요원들이 기습하는 마지막 30분, ‘제로 다크 서티’의 시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야간투시경을 쓴 군인들의 시각으로 보여 지는 이 시퀀스에서 비글로우는 조명과 사운드 등 인위적인 테크닉을 최대한 배재함으로써 현장에 실제로 와 있는 듯한 생생함을 전달한다. 보이지 않는 적들로 인한 폐소공포의 상황에 놓인 군인들을 통해 관객은 전장의 공포를 간접체험할 기회도 얻는다. 그래서 임무를 성공리에 마무리하고도 허무한 감정에 빠지는 군인들과 마야의 심정을 관객은 그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다. 비글로우는 작전이 끝난 후 환호하는 마야의 ‘웃음’이 아닌, 허망한 표정을 한 마야의 ‘눈물’로 에필로그를 대신한다. 전쟁이 남긴 허무주의. 10년을 매달린 일을 끝마친 이의 허탈함. 자신이 전쟁이라는 마약에 중독됐음을 깨닫고 다시 위험천만한 킬 존으로 돌아가는 <허트 로커>의 제임스와 달리, 마야는 돌아 갈 목표 자체를 잃었다. 그 공허함은 과연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빈라덴 사망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비극 앞에 마야의 열정은 위태롭게 위협받는다.
2013년 3월 10일 일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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