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떻게 만들어도 관객의 만족을 100% 충족시키기 어려운 강풀 원작의 영화는, 동시에 어떻게 만들어도 비판하기 쉽지 않은 영화가 돼 버렸다. 동거할 수 없는 두 가지 태도가 기이하게 뒤섞인 <26년>은 일단, ‘과거를 기억하자’는 소기의 목적은 이룬다. 1980년 5월의 ‘그 날’, 정혁(임슬옹)의 누나가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내장을 쏟아내며 쓰러질 때, ‘그 날’ 싸늘한 주검이 된 남편 앞에서 진배(진구)의 엄마가 오금을 저릴 때, ‘그 날’ 어머니를 잃은 미진(한혜진)이 그 사람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 때, ‘그 날’ 그 현장에서 무고한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야 했던 김갑세(이경영)가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마음에서 거센 소용돌이가 인다. 분노가 솟구쳤다, 한숨이 새나오다, 안타까움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26년>은 공포, 절망, 희망, 분노, 안타까움으로 관객을 끊임없이 밀어 넣는 영화다.
남은 건, 영화 자체의 완성도다. <26년>의 완성도는 영화가 지닌 선의의 의도를 모두 감당하기엔 다소 벅차 보인다. <26년>은 강풀의 원작 만화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다. 강풀의 원작은 엄청난 영화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웹툰의 영화화가 결정됐을 때 원작 팬들이 우려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2시간 안팎의 시간 안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우려는 우려에만 그치지 않는다. 방대한 에피소드를 축약하는 과정에서 개연성이 훼손되고, 인물들의 행동(진배 대신 감옥에 갇힌 조직폭력배 두목이 왜 그리 쉽게 진배를 이해하는지, 정혁이 왜 계속 마음을 뒤바꾸는지, 계엄군 동료였던 김갑세와 마상열이 왜 다른 길을 걷게 됐는지 등)이 충분한 당위를 획득하지 못한 채 비실거린다. 유족들 사이에 형성되리라 기대했던 강한 연대도, 시간에 쫓겨 흐지부지된 인상이다.
그렇다면, <26년>은 영화적으로 실망만 안기는 작품일까. ‘강풀과 제작두레에 참여한 시민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듯한 혐의’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모두의 기대를 깡그리 배반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5.18을 그린 작품은 많았다. <꽃잎>은 어린 소녀를 통해 5.18 피해자들의 상처를 되돌아 봤다. <박하사탕>은 계엄군이었던 주인공이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빌어 가해자들의 고통을 살폈다. <오래된 정원>은 5.18을 외면했던 사람들의 부채의식을, <화려한 휴가>는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에 우연히 휘말리게 된 시민군들을 정면 응시했다. 하지만 5.18의 근원인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영화는 이제껏 없었다. <26년>은 아픔의 원인에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영화다. 상처를 애도하기 이전에 치료부터 하자는 영화다.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 없이는, 아무리 증상을 어르고 달래도 한계가 있다. 아직도 ‘그 사람’은 그날에 대해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이건 웬만한 치료제로는 치유하지 못할 악성종양이다. <26년>은 악성종양에 적극 맞서려는 의지가 담긴 각성제다. 각성제의 효능은 관객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겠지만 말이다.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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