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질문은 토니 길로이에게 넘어간다. 본 없는 <본> 시리즈를 어떻게 구상할까. 토니 길로이가 <본> 시리즈를 끌어안는 방법은 <볼 얼티메이텀>의 시간대로 <본 레거시>를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뉴욕 어딘가에서 트래드스톤의 비밀을 폭로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국 국방부 산하에는 CIA 암살단 트래드스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특수 약물 처방과 함께 전투력을 상승시켜온 극비팀 ‘아웃컴’도 있었다. 트래드스톤 최정예 요원이 제이슨 본이라면, 아웃컴 최고 요원은 바로 이 남자 애론 크로스(제레미 레너)가 분명하다. 제이슨 본에 의해 정부의 암살 프로젝트가 공개될 위기에 처하자 프로그램 책임자 바이어(에드워드 노튼)는 아웃컴과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제거하려 한다. 아웃컴 요원들이 하나 둘 살해되는 가운데, 애론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정부와 사투를 벌인다.
<본 레거시>가 취하는 스토리는 기존 <본> 시리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기관에 의해 인간 병기로 키워진 비밀 요원이 국가에게 버림받은 후 외롭게 맞서는 이야기. 그러나 토니 길로이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향은 사뭇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던 고독한 본과 달리, 애론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적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본> 특유의 주제의식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무뎌졌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애론은 자신과의 사투에 집중했던 본에 비하면 무게감도 개성도 뒤쳐진다. 실존주의적인 첩보영화가 <본 레거시>에 다다라 일반 오락영화로 변모한 느낌이다.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키워줄 ‘약’을 찾아 떠나는 애론 크로스는 제이슨 본보다 오히려 <007>의 제임스 본드에 더 가깝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사건을 파헤치던 그 제임스 본드 말이다. 게다가 애론 곁에는 그를 돕는 마르타 셰어링(레이첼 와이즈) 박사가 있다. 극적인 순간 본드 걸의 역할을 자처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세상에’란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은 다른 곳에 있다. <본> 시리즈에 너무 얽매여 있다는 게 <본 레거시>의 함정이다. 토니 길로이는 본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너무 많은 본의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본에게 오히려 잡아 먹혀버리는 불상사를 낳는다. 영화는 이전 시리즈에 등장했던 화면들을 적지 않게 소환한다. 인물들의 대화에 제이슨 본을 끊임없이 언급하기도 한다. 너무 잦은 플래시백과 본에 대한 언급은 극의 흐름을 저해할 뿐 아니라 극의 이해에도 혼란을 야기 시킨다. 이러한 선택은 <본 얼티메이텀>을 보지 않은 관객들에게 특히나 쥐약이다. 영화에 편입하지 못한 채 상황 파악에 많은 시간을 빼앗길 공산이 크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주인공 제레미 레너가 차별받는 것도 문제다. 중반까지 맷 데이먼의 흔적을 쫓느라 제레미 레너는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실력을 뽐낸다. 본을 지키려다 결국 애론마저 놓치는 인상이다. 배우들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정의 밀도가 약한 것도 본의 그림자를 지나치게 의식한데에서 오는 오류다. 과거 서사 전달에 주력하는 대화는 지루하기 그지없다.
액션은 좋다. 마닐라 도심지 추적씬에서 이전 <본> 시리즈에서 경험했던 리듬감 넘치는 액션이 감지된다.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액션에서 오는 쾌감은 <본> 시리즈의 무술 감독 댄 브래들리의 능력에 크게 빚지고 있다. 다만 브래들리의 입김이 개입한 분량이 너무 적은 것은 유감이다. 액션을 봉합하는 방법도 뭔가 미덥지 못하다. 영화는 애론을 막기 위해 조금 더 진화한 살인병기를 내 보내는데, 이것이 마치 터미네이터(아놀드 스왈츠네거)를 해치우기 위해 그보다 더 진화한 인조인간을 보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본 레거시>에서 <터미네이터>의 유산(Legacy 레거시)을 만날 줄은 미처 몰랐다. 우리가 <본 레거시>에게 기대한 유산은 <터미네이터>의 유산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2012년 9월 9일 일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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