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씨 충열공파 35대손. 이것은 최익현(최민식)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 세상에 그에게 하사한 크나큰 선물이기도 하다. 또 하나 가진 게 있다면, 상대를 구워삶는 기막힌 화술과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빛나는 잔머리다. 일개 공무원이었던 그가 정재계 큰 손들을 주무르는 ‘로비의 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이 혈연과 타고난 임기응변에 비밀이 있다. 최익현 인생의 전환점은 부산 조직 폭력배 최형배(하정우)와의 만남이다. 거액의 필로폰을 빼돌리는 과정에서 접촉한 최형배가 ‘알고 보니 자신의 손자뻘 되는 먼 친척’임을 알게 된 익현은 그를 등에 업고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조폭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닌 ‘반달’인생. 뒷돈을 받아 챙기고, 윗선에 줄 대고, 카지노 경영권까지 쥐어흔들던 익현은 형배의 라이벌 조직 두목 김판호(조진웅)와 관계를 맺으면서 형배와 틀어지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최익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의리가 포장되고 권모술수가 횡행했던 80년대 시대 공기를 집어삼킨다.
언뜻 보면 <대부>나 <좋은 친구들> <카지노>가 연상된다. 그러나 할리우드식 정통 느와르와는 또 다르다. 이 영화에는 기존 장르영화의 문법을 비트는 재미가 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마틴 스콜세지 등을 필두로 한 갱스터 무비 특유의 분위기가, 부산이라는 공기와 결합하는 순간 너무나도 한국적인,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탈장르로 변형된다. 장르영화에서처럼 수위 높은 잔인한 폭력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장르를 위한 배치라기보다 캐릭터의 결을 살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관계를 다루는 방법도 흥미롭긴 마찬가지다. 치밀한 계산 하에 ‘폭력과 유머’의 완급을 조절하며 놀라운 긴장과 코믹한 에너지를 품어낸다. 눈물 질질 짜며 수작을 부리는 최익현에게 “내가 또 속는다”고 혀끝을 차는 형배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가운데 애잔한 수 있었던 건, ‘폭력과 유머’의 완벽한 조합 덕이다.
감독이 밝히기도 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조폭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아버지 세대가 남기고간 추억의 부스러기.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꼰대’가 되어간 그들을 향한 연민이자 풍자다. 이 점에서 영화는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와 맞닿은 동시에 또 다르다. <우아한 세계>의 조폭 인구(송강호)처럼 최익현 역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인물이다. 인구가 고생 끝에 원하는 집을 얻듯, 익현도 희망하던 따뜻한 보금자리를 쟁취한다. 다른 게 있다면 인구가 ‘텅 빈 집에서 홀로 라면을 씹는’ 기러기 아빠의 삶으로 편승되는 것과 달리, 익현은 <대부>의 돈 콜레오네처럼 거대 일가를 건설한다. 인구가 철저히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면, 익현은 가족(특히 맡아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킨 셈이다. 그래서 두 영화는 똑같이 아버지를 얘기하되, 남기는 뒷맛에 차이가 크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최익현의 얼굴로 마무리 되는 <범죄와의 전쟁>은 마치 식어빠진 커피를 들이 킨 것 같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선, 다시 한 번 언급할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하정우가 나오는 장면 하나하나에서 폭죽이 터진다. 더 놀랍게도 최민식이 등장하는 시퀀스 자체가 폭탄이다. 이 뜨거운 배우들의 만남을 133분밖에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다.
2012년 2월 1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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