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영화 관람을 방해할만한 결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복수, 무의미의 의미
그 남자는 다름 아닌 국정원 경호원 출신의 김수현(이병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해범을 쫓은 결과, 놈은 밥 먹듯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장경철(최민식)로 밝혀진다. 수현은 인간병기의 재능(?)을 살려 경철을 사지로 모는데 웬걸 팔목 하나 부러뜨리는 정도로 끝을 본다. 대신 추적 장치를 몸에 심고는 그가 살인을 저지르려 할 때마다 나타나 다시 손을 본 후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약혼녀가 겪은 고통의 천 배, 만 배 이상으로 되갚아주기 위한 수현의 벼린 복수극. 하지만 경철도 만만치 않은 놈인지라 마냥 않아서 당하지만은 않는다.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를 출발 신호 삼아 직선주로를 달려 기어이 끝을 보고야 마는 영화다. 일찌감치 살인마의 정체를 밝히고 시작하는 영화는 이후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수현의 경철에 대한 치밀한 복수, 경철의 수현에 대한 무차별적 반격을 집요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얼음장 같은 수현과 지옥불을 연상케 하는 경철의 대결로 압축되는 영화는 광기라는 목적지를 향해 한 눈팔지 않고 돌진한다. 그 과정에서 김지운 감독은 관객의 입장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잔혹한 장면을 묘사하는데 금기가 없다. 둔기로 머리통을 바수어 짓이긴 자두처럼 만드는 건 예사다. 수술용 메스를 발목에 찔러 넣어 아킬레스건을 그어버리고 두 손으로 입을 사정없이 찢어버리는가 하면 드라이버로 뺨을 뚫은 채 그대로 둘 정도다.
이런 장면들이 과도하게 등장하게 된 영화적 배경의 맥락에 상관없이 잔혹함의 정도가 관객을 정신적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것임은 자명하다. 헌데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목적이라면? <악마를 보았다>의 악명 높은 폭력의 스펙터클은 장르 연출에 출중한 감독의 자기만족을 위한 악취미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특정한’ 나쁜 공기를 예민한 예술적 촉수로 포착한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의 제목 ‘악마를 보았다’에는 주어인 ‘누가’가 의도적으로 생략된 상태다.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던 남자와 서서히 악마가 되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임을 고려할 때 수현의 입장에서는 경철이, 경철의 입장에서는 수현이 악마가 되는 셈이다. ‘수현은 (경철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경철은 (수현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극중 인물보다 관객을 소환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악마성을 보여주기 위해 구체화한 장면들은 명백히 관객을 겨냥한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입할만한 대상은 누가 보더라도 수현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수현이 경철에게 가하는 앙갚음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은 (아마도) 첫 번째 복수까지다. 이후 경철을 풀어주고 다시 붙잡아 죽지 않을 만큼만 상처를 입히기를 반복하는 수현의 행동에 관객은 더 이상의 대리만족 대신 당혹감과 불쾌감에 진저리친다. 복수란 게 그렇다. 분노를 잠시간 억제할 수 있는 진통제는 될지언정 궁극의 치료책은 아니다. 더군다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의 저울질에는 평형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누가 더 악마인지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경철도 그렇지만 복수의 끝에서 수현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기파멸에 가깝다.
복수가 의미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무의미’다. 그게 복수의 진실이다. 김지운 감독은 복수의 무의미함을 생성하기 위해 잔혹한 장면을 반복에 가까울 만치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스펙터클화한(化)다.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악마를 보았다>를 비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과녁을 잘못 겨냥한 셈이 된다.) 그 과정에서 살인을 즐기는 경철이나, 그런 ‘개사이코’에게 자체 징벌을 가하겠다며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는 수현이나 정신 나간 것은 매한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악마라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악마라는 것을 ‘누가’ 지켜보고 있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어의 자리를 생략해가면서 <악마를 보았다>라고 제목을 지은 그 배경에는 관객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읽힌다. ‘관객은 (수현과 경철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그럼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 복수의 폐해에 대해 반응토록, 더 나아가 사유토록 이끄는 것이 이 영화의 노림수다.
악마, 우리 욕망의 발로
물론 제목과 잔혹한 장면의 연관성만을 가지고 복수에 대한 사유를 들먹이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악마를 보았다>를 비판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장르성이다. 현실의 가장 첨예한 비극을 끌어와 게임 다루듯 가볍게 전락시키는 게 아니냐는 거다. 더 나아가 그것은 희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라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장르가 리얼리즘과 충돌할 때 나올 수 있는 당연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장르영화는 현실의 특정한 공기를 허구화하여 오락적인 측면을 극대화한 일종의 형식의 스타일이고, 이야기의 규격화다. 그런 점 때문에 장르영화가 현실에 대한 자각을 노골적으로 불러일으키면 관객은 불경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또한 대중의 욕망이고, 한편으로는 자각되지 않는 내적 죄의식의 발로다. 장르영화는 적극적인 시대 반영과 관객의 내밀한 욕망과 욕구의 구체화를 통해 자체 진화를 꾀하여왔다. 특히 복수극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감독들이 즐겨 연출하는 장르인데 최근 충무로에서 복수 소재의 영화는 하나의 트렌드다. 트렌드는 그 사회의 특정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연쇄살인마가 활개 치는 사회,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공권력 부재의 사회, 그럼으로써 사적 복수가 당연시되는 사회, 결국 잔인함에 둔감해진 사회를 <악마를 보았다>는 거울처럼 반영한다. 거울(스크린) 앞에선 관객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우리의 모습 앞에서 힘들게 버티거나 결국 도망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상업영화로는 드물게 평균율의 대중의 취향과 타협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독하게 밀어붙인다는 점도 관객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영화의 잔인함을 들어내면 <악마를 보았다>는 주인공들을 통한 꽤 굵직한 사고(思考)를 숨긴다. 앞서 밝힌 바, 복수의 유해함이 수현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메시지라면 경철의 책임에 대한 창작자의 입장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또한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악마를 보았다>의 시나리오는 김지운 감독 작품 중 가장 치밀하게 구성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느 블로거는 경철의 반격을 접한 수현이 왜 처제에게는 전화 한 통화 걸지 않았는지, 형사 경력 30년의 장인어른은 경철의 방문에 한 점 의심 없이 대문을 열어주었는지 등 강하게 비판하면서 ‘바보를 보았다’고 비꼰다.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영화의 작품성을 뒤엎을만한 치명적인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그 의도를 간파하기 쉽지 않았던 전작들의 결말과 달리 <악마를 보았다>의 결말은 이야기 구조에 비추어 보건데 가장 합리적일뿐더러 감독의 ‘어떤‘ 견해를 농축하고 있기에 좀 더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악마를 보았다>에는 잘린 머리통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장면이 총 두 번 등장한다. 실종된 수현 약혼녀의 머리통을 회수한 경찰이 인파를 밀치고 이동 중 발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한 번, 수현이 설치한 단두대에 의해 잘려나간 경철의 머리통이 그의 부모와 아들 앞으로 굴러가는 것이 또 한 번이다. 두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끝에 수미상응의 형식을 이루면서 그 속에 특정한 의미를 내포한다. 수현의 극중 행동처럼 경철에게 받은 것 그 이상으로 되갚는다는 의미(그래서 경철의 부모 뿐 아니라 아들까지도 처형식에 참관시킨다.)도 있고, 무엇보다 김지운 감독은 경철과 같은 악인의 존재는 본인 뿐 아니라 그의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보험업자로 위장한 수현이 경철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방문한 집에서 경철 모(母)는 그의 악행을 감싸기 급급하고 경철 부(父)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보험금에만 관심 있는 눈치다. 아들에 대한 빚나간 모정과 자식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책임 의식의 부재.
이 부분에서만큼 <악마를 보았다>는 이창동 감독이 <시>에서 보여줬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론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창동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청소년 범죄는 부모, 정확히 말하면 학부모의 책임이다. 학부모에게 법적인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 있고 보상해야 한다면 그 책임까지 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철의 연쇄 살인 행각을 청소년 범죄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지점에서 <시>와 <악마를 보았다>가 동일한 맥락을 공유한다고 보는 것은 경철의 악마성이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무관심 하에 더욱 몸집을 불렸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르다면, <시>는 피해자의 윤리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가해자 손자를 둔 할머니를 내세워 시를 통한 속죄로 세상의 희망을 긍정한다. 반면 <악마를 보았다>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마구잡이로 죽음을 일삼는, 그리고 묵인하고 외면하는 부모 세대를 보여주면서 지옥과 같은 세상을 절망한다.
죽음을 굳이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역으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와 달리 <악마를 보았다>는 과잉의 죽음 묘사로 오히려 고통에 둔감해지도록 (유도)한다. 고통에 무감각한, 더 정확히는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죽은 사회다. 갈수록 잔인해지는 한국영화가 많아지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용서는 없다>와 <무법자>와 <파괴된 사나이>와 곧 개봉할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과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까지. 왜 이들 영화는 잔혹해진 것일까? 잔혹한 장면 앞에서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의 정점에 놓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악마를 보았다>는 타인의 고통을 똑바로 볼 것을 요구하며 우리를 이토록 참혹한 무간지옥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다. 영화에서 두려움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실제로 우리가 외면하려는 것(들)의 표상이다. 당신은 <악마를 보았다>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2010년 8월 24일 화요일 | 글_허남웅 (영화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