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있는 연기자로 채워진, 묵직한 범죄극
한국에서도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2부작(〈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으로 유명한 에단 호크의 이름이 먼저 보인다. 한국에서는(물론 미국에서도) 큰 성공을 하지 못한 〈로드 오브 워〉나 〈어썰트 13〉같은 영화를 통해 드문드문 얼굴을 알린 정도지만, 작은 영화를 고르는 안목과 연기력에서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인정받는 배우다. 함께 주연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다. 일반 관객에게도 〈미션 임파서블 3〉의 악당 무기상으로 얼굴이 익숙할 이 배우는 2006년 〈카포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2008년 〈찰리 윌슨의 전쟁〉과 올해 〈다우트〉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단골 후보로 오르며 한창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연기파. 여기에 노장 알버트 피니와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이자 이미 10년도 더 전에 〈나의 사촌 비니〉로 수상한 경력이 있는 마리사 토메이가 합류했다. 연기파로 주역을 맞춘 진용은 단번에 이 무서운 제목의 영화가 가는 길을 설명한다.
생활고에 치여 부모의 가게를 터는 형제의 이야기란다. 괴상한 설정, 연기파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다. 간단하게 풀리지 않는 찌질한 범죄에 대한 이야기, 〈파고〉가 그랬고 〈심플플랜〉이 그랬다. 연기파들의 열정적인 연기 격돌이 예상되는 영화를 과연 누가 지휘하는 것일까. 감독을 맡은 이가 노장 시드니 루멧이라는 지점에 이르면 부모의 가게를 털다 일이 꼬이는 형제를 연기하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에단 호크가 마음 놓고 펼쳐도 될 만한 장면을 만들 것이라는 안심이 된다. 이미 개성 강한 연기파들을 데리고 묵직한 영화를 찍는데 이골이 난 명장의 이름이 영화 감독의 이름으로 올라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를 들락거린 명장
1950년대 초부터 TV 드라마를 연출하다 영화 데뷔작 〈12명의 성난 사람들〉로 1958년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 이래 80년대까지 다섯 번이나 후보에 지명됐던 노장, 시드니 루멧. 연극 무대를 떠올리게 하는 빼어난 법정물 〈12명의 성난 사람들〉로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뤘고, 자칫 잘못하면 지루하기 쉬웠을 열 두 배심원 이야기는 당대의 배우 헨리 폰다의 강렬한 모습을 남기며 성공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성공적인 데뷔전이었지만 감독으로 시드니 루멧의 전성기는 그보다 훨씬 지난 1970년대에 들어 찾아왔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시드니 루멧의 대표작이 대부분 1970년대 이후에 몰려있고, 그 중에는 루멧의 이름을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린 세 작품과 각본상 후보에 올린 한 작품이 포함된다.
본격적으로 시드니 루멧의 시대를 연 영화는 1990년대에 제목을 빌렸던 한국영화가 있을 정도로 강렬했던 〈개 같은 날의 오후〉 혹은 〈뜨거운 오후〉다. 영어 원제 〈Dog Day Afternoon〉을 번역하기에 따라 쓰는 제목인데, 어느 쪽이건 제목을 빌려썼던 1995년 한국영화가 생각 외로 커진 사건에 휘말린 여자들의 소동극인데 비해 1975년 시드니 루멧의 작품은 알 파치노와 존 카잘을 기용한 묵직한 범죄물이다. 당시 영화를 알 만한 관객에게는 알 파치노와 존 카잘의 조합이 바로 전 해 공전의 히트작 〈대부 2〉와 겹치는 까닭에 그만큼 거창한 갱스터 영화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실제로는 동료의 배신과 어설픈 계획으로 시작한 은행털이를 감당 못하는 얼치기 갱의 이야기다. 범죄물로 출세한 두 남자가 영화를 이끈다는 점을 제외하면 같은 한국어 제목을 가진 영화와 비슷한 컨셉인 셈. 하지만 영화는 이 얼치기 범죄가 미디어에 의해 부풀어지는 과정을 서늘하게 다룬다. 미디어의 생리를 냉정하게 쏘아보며 범죄가 스스로 커가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1994년 올리버 스톤의 <킬러>를 연상케 한다.
허나, 미디어에 대한 시드니 루멧의 날카로운 시선을 보다 분명하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은 따로 있다. 〈개 같은 날의 오후〉 바로 이듬해 개봉한, 많은 사람들이 시드니 루멧의 대표작으로 꼽는, <네트워크>가 바로 그 작품이다. 루멧은 이 작품으로 〈개 같은 날의 오후〉에 이어 2년 연속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다. 사회적인 주제를 주류 영화 문법에 담는 시드니 루멧의 솜씨는 〈네트워크〉에서 정점에 닿으며, 주연을 맡았던 페이 더너웨이와 윌리엄 홀덴, 로버트 듀발, 피터 핀치에게도 빼어난 필모그래피를 선사한다. 이듬해 아카데미 상에서 각본상과 주요 연기상을 휩쓸었지만 시드니 루멧이 감독상을 가져가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 그 해 상대가 아카데미 역사상 마법에 홀린 영화 중 하나로 유명한 〈록키〉인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루멧은 그 후 〈도시의 왕자〉로 각본상 후보에, 〈심판〉으로 다시 한 번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만 모두 타지 못하고, 2005년에 공로상을 수상했다.
꾸준한 스토리텔링의 달인
연극배우로 출발해 TV 연출을 시작한 특이한 경력과 사회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전통적인 드라마 연출에 능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솜씨를 느낄 수 있는 작품에 아카데미 상 후보작 목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말끔한 후보작 리스트보다 사이에 끼어있는 작품이 훨씬 개성적이고 흥미롭다. 이를테면 1974년에 개봉한 〈오리엔트 특급살인〉이 그렇다. 같은 제목이 또 있을 수 없는 만큼, 그렇다. 영국 출신 전설적인 추리작가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의 그 작품이다. 전설적인 작가의 대표작인 만큼 뒷통수 치기로 유명한 플롯을 밝힐 수 없으니 넘어가고 보더라도, 시드니 루멧의 필모그래피에서 이런 정통 탐정물은 특이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이번에 개봉하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도 출연하는 알버트 피니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셜록 홈즈 에르큐르 포와로 역을 맡았고, 줄지어 로렌 바콜, 잉그리드 버그만, 숀 코너리, 안쏘니 퍼킨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로 이어지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매우 호사스러운 영화다.
그에 비하면 숀 코너리와 소시적의 크리스토퍼 월큰을 볼 수 있는 〈도청작전〉은 훨씬 시드니 루멧다운 영화다. 출감한 전설적인 도둑 앤더슨(숀 코너리)이 실력있는 동료들을 모아 큰 한 탕을 꾸미고 성공일보직전까지 가는 중반부까지는 당시 유행했던 케이퍼 영화를 연상하게 하지만, 순식간에 관객의 기대를 무시하고 냉혹하게 엔딩으로 몰아부치는 솜씨는 〈개 같은 날의 오후〉나 〈네트워크〉같은 작품을 찍은 감독의 취향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무려 18년이 지난 1989년 숀 코너리와 다시 만나 찍은 〈패밀리 비즈니스〉나 한창 꽃미남 호르몬이 넘쳤던 시절의 리버 피닉스를 날 것 그대로 볼 수 있는 1988년 영화 〈허공 속의 질주〉같은 영화는 1970년대 날 선 시선이 가족을 보듬으며 따뜻해졌음을 알 수 있어 흥미롭다. 그 연장선상에는 존 카사베츠의 영화를 샤론 스톤을 기용해 리메이크한 1999년 작 〈글로리아〉나 빈 디젤을 주인공으로 쓴 코미디 영화 〈내 결점을 찾아라〉같은 영화가 있다.
탄탄한 이야기의 달인이자, 날카로운 시선을 지녔던 감독이 가족을 껴안고 오랜만에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로 우리 앞에 섰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제목을 가졌어도, 아무리 막장 스토리를 담았어도 노장 시드니 루멧의 영화라면 분명 깊이 있고 찰기 넘치는 작품일 것이라 예상된다. 믿음직한 배우와 함께 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 글_이필립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