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다리가 떨어져나가는 정면 충돌씬의 쾌감도 있었고, 맨몸으로 차에 매달린채 차체를 부딪히는 추격씬도 멋있었지만 내게 [데쓰 프루프]는 일종의 다리 페티쉬 영화 - 굳이 표현하자면 - 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정적 기운은, 집요하게 여인의 몸 - 늘씬한 다리로부터 - 을 훑어가는 카메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쉼없는 수다도 별 감흥이 없었고 그렇게 통쾌하다던 영화의 결말도 별 감흥이 없었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는 [보디히트]를 연상시킬만큼 후끈했다. 이 후끈함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데쓰 프루프] 최고의 매력이다. 스턴트맨 마이크가 변태성욕자라는 경찰관의 느닷없는 한 마디를 아무 저항없이 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게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었던 이 영화의 후반부 - 물론 느닷없는 엔딩이 조금 웃기기는 했다만 - 가 썩 달갑지는 않았다. 빙 둘러 갈 것 없이 간단히 얘기하자면, 커트러셀이 망가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범죄의 소굴로 기어들어가기는 했지만(겉보기만큼 당당한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뭔데 까짓거 갈아버리지라는 투로 내뱉던(적어도 똥폼은 제대로 잡을 줄 알았던) [뉴욕탈출]에서의 커트러셀은 어디로 갔단 말이더냐.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 판국에. 죄송해요, 장난이었어요라니!! 어쩌면 나는 멋진 악인을 좋아하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데쓰 프루프]에서 기대했던 타란티노의 모습은, 자신의 물건이 녹아 떨어지는데도 "까짓거 빨리 하면 되지."라고 씨부리는 - [플래닛테러]에서 보여주었던 -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한다. 기왕지사 갈거면 가는데까지 가보자는 그 혈기. [데쓰 프루프]의 엔딩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 윤리적이다. 그래서 나는 [플래닛테러]가 더 좋았다.
다시 다리로 돌아가자. 여성의 다리는 단순히 걷는 것 외에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정도의 힘이냐면 자신을 죽이기도 하고, 타인을 죽이기도 한다. 남성의 눈요기감으로 전락했던 [데쓰 프루프] 전반부의 여성의 다리는 후반부에서도 낚시대에 꽂힌 떡밥 - 스턴트맨 마이크에게 다리 페티쉬는 성관계의 시작이요, 충돌은 그 끝이다. 믿거나 말거나. - 역할을 하지만, 돌려차기와 싸커킥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짓밟는 - 당연하게도, 밟힐만 하다 - 도구로 사용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플래닛테러]는 더욱 명시적이다. 단순히 걷는 용도로 쓰일 다리라면 처음에 그러했듯 막대기를 꽂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것을 기관총으로 대체하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이제 늘씬한 다리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내장이 적출되는 가학성이 아닌, 이 성적 암시와 폭력의 절묘한 연계는 [플래닛테러]를 보다 선정영화에 가깝도록 만든다. 어쨌거나.
정리가 잘 되지 않지만, 결국 이 두서없는 잡담은 나는 선정영화를 좋아한다라는 고백과 다름 없다.
글_김시광 객원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