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읽게될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가설일 뿐임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내가 뭘 알겠는가?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한다. 떼거리로. 도대체 이게 무슨 미친 일인가? 이유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 - 호기심은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렬한 욕구 중 하나일 것이다. 답이 없는 상황이 태반임에도 그러한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적잖은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 은, 몇 줌 되지도 않는 지식을 동원해 온갖 가설을 세운다. 처음에는 테러였다. 효과가 가장 낮으리라 생각되는 공원에 대한 테러. 점차 동시다발적으로 규모가 늘어나자, 테러가 원인이 아니라고 깨닫게 된 사람들은 이제 자연재해라고 믿기 시작한다. 말바꾸기가 본직인 것처럼 보이는 전문가들은 제 나름대로 떠들어댄다. 그러다가, 하나가 사람들에게 꽂혔다. 인간의 만행을 피하지도 못한채, 그 자리에서 모두 받아낸 식물의 반격. 이것은 영화 속에서 하나의 기정사실이 된다.
바람에 의해 확산되는 화학물질이라는 설정때문에 영화 속의 인물들은 수풀의 작은 움직임 - [싸인]에서 옥수수밭의 작은 움직임만으로 관객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샤말란의 재능은 여기에서도 재현된다 - 이 느껴질 때, 바람이 살며시 방향을 바꿀 때, 아니 그냥 잔디밭을 지나쳐가면서도 두려움에 질려 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런데 어디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도망친다. 식물들의 공격은 인간만을 타겟으로 한다고 믿게 되었기에. 그럼 어디에 사람이 없을까? 아니 사람이 적을까? 도시가 아닌 곳, 자연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게 참 재미있다. 식물이 독성을 내뿜는다고 믿으면서도 그들은 식물이 없는 곳 - 그러니까 인공의 것 - 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그들은 잔디가 뒤덮은 평원을 지나, 숲 속의 외딴 집으로 도망친다. (실은 공기를 매개로 독이 전파된다면 인간이 살 곳은 없다, 완전히 밀폐된 밀실에서 얼마나 살겠는가) 재미있는 점 또 한 가지. 식물의 품을 떠난 독성 화학물질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면서 사람들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이고 어떤 사람은 안 죽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게 납득하기가 어렵다. 납득이 안되는게 당연한거다. 영화는 제목에 충실하다. 모든 것은 하나의 해프닝이다. 모르는 일과 그것에 대한 삽질 대응. 영화가 절대 사실인 것처럼 보여주는 설정, 즉 식물이 사람을 죽인다는 명제도 실은 확실하지 않다. 그것은 TV에서 설명해준 것일뿐, 과학자가 틀리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거든.
[해프닝]에서 관객이 유념해야 하는 단서는 단촐하게도 단 두 가지 뿐이다. 첫째,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는 멸망을 맞는다(이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둘째, 자연의 섭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이건 사실일 것 같다). 그 외의 모든 것에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해프닝]은 이성이 무력해질만한 불가사의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상황을 보면 된다. 죽어가는 사람들. 영화는 집요하게 사람들의 죽음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영화는 동시에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즉, 식물의 공격에 대해 느끼는 사람들의 공포를 환기시킨다. 그들의 공포는 사실(객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믿음(주관)에 근거한다. 이는 결국 인간의 이성이란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 최고의 무기, 집단 이성도 별 볼 일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야 산다는 독설 - 이건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삶으로 이르는 좁은 길이다 - 을 들으며, 나는 "허 참, 막나가는구만."이라고 생각하며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혹자는 반지의 색깔을 내세우며, 식물이 인간의 에너지에 반응하기 때문에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었던 부부가 살아남았다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신빙성은 높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는 것이다. 아마, 그게 그렇게 중요한 정보라면 영화 속에서 샤말란이 반지를 클로즈업 한 두 번쯤은 해줬겠지. 게다가 평원에서 바람을 피하지 못했을 때, 그 때 그들도 다른 죽은 이와 비슷한 심정이었을거라 생각되기도 하고(색깔이야 어쨌든간에). 그러한 부분들은 영화의 추가적 잔재미에 불과할 뿐이다. 반지라는 소재의 주된 목표는 식물도 사람처럼 에너지를 내뿜는다라는 이야기에 대해 조금의 설득력을 더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살아난 사람이라면, 그것을 하나의 징조로 믿을 수도 있겠지. 영화 [싸인]에서 멜깁슨이 나누었던 두 부류의 사람들 중,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 - 어떤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여 절대자의 숨결을 느끼는 이들 - 처럼.
[해프닝]은 인간의 무력함을 이야기한다. 누가 자신을 죽이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어떤 무언가의 의지에 따라, 노력여하에도 불문하고 간단히 죽어버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샤말란의 운명론이자, 구체적으로는 [싸인]에서의 예정론과 같은 것이다. 샤말란이 보는 삶이란 늘 불안정하고 위험한 것이다. 영화의 극단적 설정이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삶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해보인다. 과연 그것을 인지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어차피 죽을거 대충 살아도 되겠구나 하실 이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뭐, 삶의 방식은 자기가 결정하는거니까. 실은 나도 그 비슷할게다. 그러나 샤말란의 주장은 좀 더 순수해보인다. 늘상 들먹였던 조금은 유치한 소재만큼이나. 그러니까, 샤말란은 짧은 인생 싸우기보다는 사랑하며 살다 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추신-
하나.
샤말란, 반전. 이 두 단어를 같은 글에서 안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진작부터 그랬지만, 이젠 꽤 지겹다. 자연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해놓고, 끝까지 뚝심있게 그 주장을 관철하는 샤말란을 보면서, 본인도 엄청나게 지겨운게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둘.
[해프닝]을 보고난 후 [싸인]을 보면, 기존에 감상했던 [싸인]보다 두 배는 재미있는 [싸인]을 볼 수 있다. [해프닝]이 재미없기 때문이 아니라, 두 영화가 꽤 닮았기 때문이다. 이거, 내 경험담이다. 사실 본문에 [싸인]의 예를 들 수 있었던 이유는 [해프닝]을 보고 집에 들어와서 [싸인]을 다시 감상했기 때문이다.
셋.
[해프닝]이 사랑하며 살라는 얘기라면, [싸인]은 결국 신을 믿으라 -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서 행복하기 위해서 - 는 얘기다. 두 작품을 합치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사람)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샤말란의 새계명이 탄생한다. 사실은 별반 남들과 다를 것도 없는 글을 굳이 쓰기 시작한 이유의 절반은 이 말이 하고 싶어서였다. 극단적 소재들에도 불구하고 샤말란의 영화는 종교적 관점에서라면 상당히 보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넷.
[해프닝]은 장점을 꽤 갖춘 영화다. 인상적인 장면 - 오프닝씬부터 - 도 꽤 많고, 빠져나갈 곳 없는 재앙이 꽤나 무섭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갖춘 영화다. (굳이 손가락 평점을 주자면, 나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겠다) 솔직히 영화의 연출이 전작들 - 아직 못 본 [레이디 인 더 워터]는 논외로 하자 - 만큼 부드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례로 튀는 장면이 많다. 재앙이 가져온 충격의 크기에 비해, 두 남녀의 사랑이 보잘 것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주인공 마크 월버그 역시 브루스 윌리스나 멜깁슨, 와킨 피닉스만큼 연기를 잘 하는 배우는 아닌 것 같다.
다섯.
음악 정말 죽인다!!
글_김시광(네오이마주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