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어나 보더들에게 겨울이 지나가는 순간이 아쉬운 것처럼, 서퍼나 골퍼들에게는 겨울이 끝나가는 것이 반갑다. 세상 모든 취미 활동에는 시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날씨 탓을 할 필요 없이 영화관이나 집에서 즐기는 영화보기마저도 ‘시즌’이라는 개념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 해 영화 흥행 반을 책임진다는 겨울 시즌(헐리웃 기준으로 부르면 ‘크리스마스’ 시즌)과 나머지 반의 60%를 책임진다는 여름 시즌을 비껴가면 볼 만한 영화가 현저히 줄어드는 탓이다.
이는 동시에 비주류 영화팬의 계절이기도 하다. 흥행을 위해 박터지는 싸움을 하는 시즌에는 멀티플렉스를 몇 개 상영관 씩 잡는 블록버스터의 폭력에 작은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팬은 미처 보기도 전에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마련이다. 바쁜 일정에 한 주가 지나갈 때쯤, 함께 영화관에서 사라져버린 작품이 몇 편이던가. 하지만 오프시즌에 돌입하면, 더 다양한 영화를 좀 더 여유를 두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반가워진다. 작은 영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몇 몇 영화관에 목을 매거나 작년 〈원스〉와 같은 기적적인 스테디 행진을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영화는 더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개봉작을 보니 떠오르는 명품의 가치
기대를 잔뜩 안고 보러 간 영화가 오히려 과거 작품을 그리워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튜더 왕조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천일의 스캔들〉이 그런 영화가 될 듯 하다. 튜더 왕조 초기,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볼린 사이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그 간 앤 볼린 이야기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메리 볼린을 영화 전반부에 배치해 색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여기다 파란만장한 궁궐 생활과 비운의 최후로 유명했던 앤 볼린과 메리 볼린에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을 캐스팅하고 헨리 8세에 에릭 바나를 기용한 화려한 진용이 튜더 왕조물 팬에게 상당한 기대를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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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영화를 본 결과는 오히려 주느비에브 뷔졸드가 앤 볼린 역을 맡았던 1969년작 〈천일의 앤〉을 추억하는 올드팬이 많은 듯 하다. 영리하고 예쁘며 야심만만한 앤 볼린과 우유부단한 헨리 8세가 현란한 심리전을 펼치는 〈천일의 스캔들〉이 못 만든 영화라서가 아니다.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으며 화려해 현대 팬들이 즐길 만 하다. 하지만 〈천일의 앤〉을 먼저 본 관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냉정한 정치극 성격을 가진 〈천일의 스캔들〉에 비해 〈천일의 앤〉은 60년대 영화답게 비극적 정서가 주를 이루는 매우 감상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치극과 심리 스릴러의 틀로 헨리 8세와 앤 볼린 사이를 재해석한 〈천일의 스캔들〉이 개성적인 영화인 까닭은 18세 때 헨리 8세와 결혼해 딸(후에 엘리자베스 1세)을 낳고 마녀로 몰려 참수형을 당한 한 여인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졌던 〈천일의 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를 이을 아들을 가지지 못한 죄를 물어 항상 새로운 여자를 찾아 다닐 구실로 사용했던 희대의 난봉꾼 왕 헨리 8세에게 왕비를 구실로 결혼해 딸을 낳았다가 천일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앤 볼린이라는 구도는 〈천일의 앤〉이후 매우 일반적인 해석이었다. 더구나 감상적인 〈천일의 앤〉은 (탑에 유폐되어 날짜를 세다 ‘이제 천일이구나’하고 한숨을 쉬거나, 형장 앞에서 ‘내 목은 앏아서 베는 게 어렵지 않을거야’ 등의) 눈물 솟구치는 명장면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인상적인 전작을 기억하게 하는 신작
오프시즌 개봉영화 중 가장 블록버스터에 가까운 〈10000 B.C.〉는 독일계 블록버스터 전문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의 작품이다. 개봉 주말 예매율 1위를 달성하며 수많은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낚은 영화의 예고편은 생각보다 시시한 영화에 대한 실망을 배가시키는데 한 몫 크게 했다는 중평. 그냥 즐기기에는 나쁘지 않은 단순한 이야기를 SF에 가까운 고증을 통해 영상화한 영화라 아쉬움을 묻을 수는 있겠지만 이보다 훨씬 재미있었던 감독의 전작을 기억하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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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와 박진감에서 롤랜드 에머리히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는 2004년작 〈투모로우〉는 어쩌다 한 번 나오는 결과라 하더라도, 이번처럼 SF적인 역사 고증을 하느니 아예 SF로 고대 문명을 날려버린 〈스타게이트〉의 시원함이나 외계인 침공을 역시 단순무식하게 그린 〈인디펜던스 데이〉의 날렵함이 그리운 것은 혼자만의 감정일까. 또 롤랜드 에머리히는 대스타로 발돋음하기 전 유망주를 자신의 영화에 기용한 적이 많은 까닭에 파릇파릇한 시절의 스타를 확인하는 재미도 있는 감독이다. 헐리웃에서 대형 영화를 맡을 수 있게 해준 성공적인 B급 SF영화 〈유니버셜 솔저〉에서 전성기 시절의 장 끌로드 반담과 돌프 룬드그렌을 확인할 수 있고, 헐리웃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거듭나게 해 준 〈스타게이트〉에서는 드라마 시리즈 〈보스턴 리걸〉에서 후덕해지기전 제임스 스페이더를 볼 수 있으며, 현재와 거의 변화가 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지금과 같은 스타성과 연기력을 인정 받기 전 윌 스미스가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젊고 괄괄한 조종사로 나오는 모습 또한 반갑다. 이제 고인이 된 히스 레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롤랜드 에머리히의 〈패트리어트〉에서 멜 깁슨과 함께 공연한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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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오스카를 휩쓴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명불허전이라는 중평. 깊이와 감각을 소유한 천재로 일찌감치 〈부기나이트〉〈매그놀리아〉를 선보인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은 이 명민한 감독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재미만으로 보기 버거운 작품의 무게를 피하고 싶은 당신이라면 귀여운 러브스토리를 폴 토마스 앤더슨 식 감각으로 포장한 2002년작 〈펀치 드렁크 러브〉가 더 어울릴 듯싶다. 과작인 폴 토마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특이한 영화지만, 애덤 샌들러와 에밀리 왓슨을 기용해 만든 이 독특한 로맨스 영화’만’의 팬도 많은 까닭이다. 여전히 광기 넘치는 연기로 (또 오스카 시상식에서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여전한 카리스마를 자랑한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주연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반가운 팬들도 많겠다.
국내에는 개봉하지 않은 2005년작 〈잭과 로즈의 발라드〉이후 2년만의 컴백이지만, 국내팬들은 2002년 〈갱스 오브 뉴욕〉이후 무려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국내에는 2008년 개봉했으므로) 6년만의 새 작품이기 때문이다. 탱탱하던 80년대 〈내 아름다운 세탁소〉〈전망 좋은 집〉〈프라하의 봄〉〈나의 왼발〉같은 영화에 출연해 당대의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는 특히나 많았던) 아트하우스 영화팬들에게 주목을 받던 시절에는 아직 지금과 같은 존재감이 아니었지만, 1992년작 〈라스트 모히칸〉이후로 골수 여성팬을 만든 이후 섹시남을 벗어나 〈순수의 시대〉〈아버지의 이름으로〉〈크루서블〉〈복서〉로 이어지는 90년대 필모그래피는 대배우에 어울릴 만한 수준이다. 뛰어난 연기력은 인정하지만 〈갱스 오브 뉴욕〉과 〈데어 윌 비 블러드〉만으로 90년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섹시함을 확인할 수 없는 관객이라면 반드시 〈라스트 모히칸〉을 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락 카페와 커피숍 인테리어를 포스터로 장악하며 지금도 케이블 채널에서 올드 여성팬의 눈을 붙잡는 섹시한 인디언 ‘호크아이’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계절, 그 영화 뒤에는 더 풍부한 역사가 있어 반갑다.
2008년 3월 28일 금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