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을 기대한 당신이라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의 변화를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두 영화는 닮아있다. 순수한 음악적 신념이 영락(零落)한 지방의 퇴폐적인 취향의 소품으로 몰락되는 가운데서도 기타를 놓지 않는 성우(이얼)의 모습과 탈출구가 아득한 일상의 지리멸렬함 속에서도 끝끝내 핸드볼 공을 놓을 수 없는 미숙(문소리)의 모습은 유사하다. 주류를 꿈꾸는 비주류의 삶. 결국 두 영화는 극악한 현실 끝에서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비추는 이야기다. 하지만 두 영화는 그 시선을 비추는 양식에서 격차를 벌리고 있다. 동시에 그건 모티브의 근원지가 허구와 실화라는 개별적 차이로부터 기인하는 바이기도 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핸드볼 결승전을 바탕으로 허구의 나래를 펼친 <우생순>은 실존의 서사를 밑그림으로 특정 소재의 클리셰를 채색한다. 갈등을 화합으로 극복하고, 역경을 뛰어넘는 동료애를 묘사하며, 한계를 극복하는 투지와 노력을 통한 팀원의 성장, 그리고 역동적인 순간에 차오르는 신파의 절정을 드리운다. <우생순>은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나 만화를 통해 규격화된 포맷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상투적인 기획용 소품이기 전에 공식화된 기본 자질에 가깝게 활용되며 전형성의 토대를 외부적으로 활용하되 내면적인 깊이를 끌어내는데 주력한다. 게다가 <우생순>을 돋보이게 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클리셰의 표현방식에 있다. <우생순>은 공식들의 규격을 거부하지 않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통해 상투성의 늪을 과감히 돌진해나간다. 갈등과 화합의 공식을 조합하는 부호들은 나열의 방식이 아니라 표현의 방식으로 제자리를 찾고 있다. 표정을 지닌 클리셰들. <우생순>은 영화적 연출의 부호로서 스크린을 점유한 상투성의 내부에 표정과 목소리로 대변되는 현실적 생동감을 끌어내며 진심을 연출한다. 그건 <우생순>의 극적 연출이 현실의 서사를 담보로 이야기를 대출받았다는 사실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온전한 허구를 바탕으로 문학적 취향의 플롯을 예민하게 밀고 나가던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다른 방식의 제스처가 발생한 까닭이기도 하다.
<우생순>이 실화로부터 온전히 취득한 건 영화의 후반전이라 할 수 있는 극적 장면, 2004 아테네 올림픽 핸드볼 경기 순간의 재현이겠지만 그 이전에 선수들의 비루한 삶을 조명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수긍은 그것의 이면이 영화적 스토리텔링과 실제적 차이가 있을 뿐, 그 정서적 공감대는 실로 큰 격차를 벌리지 않았을 것이란 짐작이 존재하는 덕분이다. 결국 <우생순>의 승부가 애처로운 건 그것이 정해진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원통한 서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그것이 국위선양의 명예를 뒤집어 쓰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어느 캐릭터 혹은 팀원들의 성장을 함께 하며 자라난 극적 편애 때문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연들이 주연이 되는 순간, 마이너리거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이루고자 하는 신화의 절박함으로부터 전이되는 숭고함. 그 순간, 현실에서 신화로 추앙 받고 잊혀져 가던 존재들의 박제 같던 순간은 영화를 통해 표정을 얻고 그 내면의 감정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의 단상에 오른다.
핸드볼이라는 마이너리티의 군상이 몸으로 연출해 낸 각본 없는 드라마가 각본을 통해 재현된 건, 그 이면에 잔재하던 고단한 일상이 경솔하게 잊혀졌거나 알려지지 못했음을 통감하기 위해서다. 핸드볼이라는 종목이 짊어진 소외감은 <우생순>이 끌어안은 마이너리티의 본질적인 표상에 가깝다. 한산한 객석을 배경으로 리그 우승을 거두고도 팀 해체를 감수해야 하는 핸드볼 실업 리그팀의 아이러니한 상황은 스포트라이트를 얻지 못한 주변인의 앙상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그녀들은 핸드볼과의 악연을 차마 놓지 못하며 비루한 현실을 견뎌낸다. <우생순>은 이를 숭고한 의식이나 선량한 신념으로 위장하지 않는다. 단지 대안이 없는 궁색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개인적 신망을 위해서 였음이라고 솔직하게 드러낸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건, 자신의 열망 때문이었건, 삶의 의미를 지탱하고자 했던 의지가 핸드볼이라는 일말의 대안 앞에서 억척스럽게 버텨내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생순>은 영광의 순간을 재현하기 이전에, 영광의 순간을 위해 그녀들이 온몸으로 견뎌야 했을 고난의 서사를 드러낸다. 그녀들이 4년 만에 찾아온 명예의 제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건 그 코트가 핸드볼이라는 자신들의 믿음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소외감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코트는 승리를 위한 투지보다도 현실을 잊기 위한, 혹은 현실의 남루함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환각의 무대가 아니라 그 현실을 타전하기 위한 안간힘의 표상이 된다. 결국 코트의 영광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현실적 애환을 오버랩시키기 위한 고군분투에 가깝다. 그래서 <우생순>은 허구의 기법을 빌리지만 허구의 감정을 분출하지 않는다. 진정성. 무대를 누비는 선수들로부터 넘어오는 절박감은 결코 자아도취적인 낭만으로 이해되지도, 될 수도 없다. 2인자에 대한 포용을 남발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1인자를 갈구했던 연유를 되새기게 만든다. 영광보다도 간절했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우생순>은 그녀들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 분명한 그 순간에 대한 박수이자 애도에 가깝다. 남루한 현실을 극복한 그녀들의 집념에 박수를, 동시에 그녀들이 다시 한번 그 영광에서 내려와 또 한번 걸어야 할 최악의 일상들에 대한 애도를 바치는 셈이다.
여성을 위시(爲始)한 <우생순>은 사회적 마이너리티로서의 여성성을 반추한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생순>은 남성을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이 손을 맞잡으며 동시에 남성을 성숙시키는 형식으로 구현된다. <우생순>은 남성 중심 혹은 남성 주도의 사회에 대한 어떤 시선을 두고 있다. 혜경(김정은)이 감독 대행직에서 승필(엄태웅)에게 밀려나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약간의 비약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분명 사회적 현실 속에서 성별 인지도를 나누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수긍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세대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던 그녀들이 자신들의 동질감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팀워크를 형성하게 된다는 점은 차별의 생태계를 극복하는 여성들의 생존 본능을 묘사했음에 가깝다. 또한 남성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여성들의 성숙한 자의식을 확고히 다지고 이것이 되려 유약한 남성성을 함께 성숙시키고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이는 승패의 법칙 안에서 성공의 드라마를 성취하던 스포츠 영화의 클리셰를 여성 영화의 범주로 확장하는 성취감에 가깝다.
<우생순>은 황폐한 오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강요하기보다도 그 삶의 희박한 내일을 향해 뛰어간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웃음을 부여한다. 동시에 현실을 토대로 허구를 재생했으나 그것이 허구를 과장하지 않고 현실을 다시 복기시킨다는 점에서 큰 미덕을 품고 있다. 영광을 미화하지 않으며 동시에 감상을 조장하지 않는다. 특히나 이미 정해진 서사이기에 극적인 연출이 용이했을 결정적 순간을 절제된 슬로모션과 거세된 음향으로 처리한 것 또한 인상적이다. <우생순>은 영화가 지극히 현실에 빚지고 있음을 잘 알며 동시에 그것에 지나치게 기대지 않아서 인상적이다. 또한 무덤덤한 표정으로 슬픔을 드러낼 줄 알며 미소로서 애환을 담아낼 줄 안다. 그건 아마도 모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마이너리티의 고독한 내면을 잘 아는 임순례 감독의 감수성이 빛을 발한 덕분일 것이다. 또한 개인을 과시하지 않고 단단한 팀워크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같은 요인일 것이다.
<우생순>은 그렇게 슬프지 않은 허구를 통해 슬픈 현실을 되짚고 각인시킨다. 특히나 실제 아테네 올림픽 당시 여자핸드볼 선수들과 감독의 인터뷰 장면이 등장하고, 그 뒤로 이어지는 선수들의 경기 장면 스틸컷은 영화의 정서적 구심점을 되짚게 한다. 소외 받은 이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매번 올림픽의 주역이 되어 돌아오는 선수들의 억척스런 표정은 <우생순>의 사연과 함께 드라마틱한 감정으로 승화된다. 게다가 그것은 스스로 감상에 젖으며 지독한 마이너리티적 자아도취를 자막으로 실어나르던 어떤 영화에 비해서 정말이지 순결한 감동이 아닐 수 없으며 마이너리티를 위한 진정한 헌사일 것이다.
2008년 1월 2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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