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데이즈>는 순발력 있는 두뇌 회전을 요구하는 스릴러 장르의 게임적 외피를 두르고 있다. 7일이라는 서사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동선의 너비에 비해 관객에겐 제한적인 시선을 제공한다. 이는 관객이 이야기와 경쟁하듯 단서를 수집하는 참여형 스릴러이기 이전에 드러난 단서만으로 이야기의 추이를 살펴야 하는 관찰형 스릴러인 덕분이다. 범죄 현장과 법정을 아우르는 <세븐데이즈>의 지정학적 소양 역시 심리적 정서보다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를 추월하고픈 가속의 심리보단 이야기를 추격하고픈 검증의 논리로 활용된다. 그리고 그 검증에 앞서 영화를 선점하는 건 이야기에 내재된 감정이다. 뒤엉킨 사건의 혼란한 매듭을 풀어나가야 할 계기가 되는 건 모성애이며 이는 거짓말 같은 계기, 즉 유망한 변호사가 패배가 확실해 보이는 살해용의자의 변호를 맡는다는 이야기의 합당한 근거가 된다.
단서들은 흩어진 퍼즐을 맞추는 일부의 조각이 되기보단 완성되지 못한 밑그림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세븐데이즈>는 퍼즐 맞추기보다 그림 그리기에 가깝다. 완성하고자 하는 밑그림을 따라갈 뿐, 전체적인 이야기의 완성형을 미리 짐작하긴 힘들다. 다양한 용의자의 몽타주를 그려내다가 이내 불살라버린 후, 피해자(구체적으론 납치된 딸)의 상을 선명히 띄우는 도입부의 시퀀스는 애초에 과정의 추리에 동참하기보다 증후를 통해 확인되는 결과의 모양새를 받아들이길 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해자는 막연하지만 피해자는 선명하다. 이는 유지연이 꾀하는 납치극에 대한 해결 의지 방향에 대한 단서이기도 하다. 마치 납치범의 검거보다도 딸의 구출이 우선이라는 어머니의 심정은 <세븐데이즈>의 스릴러가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궁극적 이유다. 그건 동시에 <그놈 목소리>와 <세븐데이즈>가 그 놈 목소리를 통해 사건을 진행시키는 전지적 관점의 관음성을 스릴러의 매개적 본능으로 삼고 있음에도 전자와 후자의 본능적 물음표가 각각 ‘누구’와 ‘어떻게’로 귀결되는 방식적 차이에 대한 단서가 된다.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건, 유지연이 승률 99%의 변호사라는 점이다. 극 초반, 유지연이 변호에 성공한 양창구(오광록)는 분명 사회적 악인이다. 결국 유지연은 물질적 대가가 있는 싸움이라면 도덕성의 판별보단 자신의 능력 함양을 먼저 판단하는 프로에 가깝다. <세븐데이즈>는 그 밑바탕에 잠재된 개인의 죄의식을 비튼다. 납치범의 요구에 난색을 표하는 건 그것이 악인임에 확실해 보이는 이의 비호를 맡아야 하는 죄책감이라기 보단 패배할 가능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세븐데이즈>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그 지점이다. 선악의 구분이 아닌 승패의 구분을 중시하던 변호사의 처세는 자신이 변호해야 할 살인용의자의 양심을 들여다보며 심증을 찾기 전에, 알리바이를 수집하고 물증을 찾는다. 결국 유지연이 도덕성의 감상주의에 젖지 않는 현실적이고 냉철한 변호사라는 점은 이야기를 주도하는 캐릭터적 신뢰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지나친 감정적 기복을 배제한 이성적 관찰을 용이하게 한다. 또한 그녀의 변호를 받게 된 정철진(최명수)의 잔인 무도한 성품은 상대적으로 어떤 동정심을 배제시키는 캐릭터란 점에서 또한 효과적이다.
물론 7일간의 서사가 고루 평탄하게 구성된 것은 아니다. 특히나 전반부의 긴박한 전개 속도가 후반부로 들어서며 다소 느슨해지는 듯한 모양새가 미세하게 감지되는 건 장르적인 완성도를 해치는 요인이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이를 순차적으로 배치, 활용하는 능력은 가히 탁월하다. 전작인 <구타유발자들>에서 발산하던 원시적인 마초의 기운을 도시적으로 탈바꿈시킨 듯한 <세븐데이즈>의 느와르적 캐릭터들은 한차례 나른해지던 이야기의 호흡에 강한 박동을 가한다. 캐릭터를 몸소 실천해버리는 듯한 배우들의 연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전체적인 집중력을 형성시킨다. 또한 <구타유발자들>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였던 인정(차예련)이 남성들 가운데서 나약한 홍일점을 찍었던 것과 달리 <세븐데이즈>의 서사를 가파르게 달리는 유지연이 적극적인 원톱의 홍일점을 찍는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인상적이다.
<세븐데이즈>는 납치극을 원형으로 한 딜레마 구조를 통해 게임의 유희를 습득하지만 장르적인 재미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본심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전작에서 시골적 향토성을 매개로 사악하면서도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난장판처럼 끌어낸 원신연 감독은 그와 반대로 <세븐 데이즈>에선 범죄의 사악한 속성을 통해 풀어헤친 인간의 잠재적 본성을 도시의 냉소적 기운을 그릇삼아 채운다. 범죄적 유무를 가늠하고 단죄하기 위해선 유죄를 입증할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법정재판주의를 통해 유죄의 불확실성을 밝힘과 동시에 무죄를 입증하려는 유지연의 진술은 결과적으로 죄와 벌을 가늠하는 법이 비합리적인 상관관계임을 폭로한다. 인간의 죄를 단죄하는 법의 원리가 논리적인 근거 부족으로 힘을 상실하는 순간의 허탈감은 <세븐데이즈>에서 오히려 쾌감의 속성으로 역전된다. 이는 본질의 전복임과 동시에 해학적인 비틀기의 속성에 가깝다.
끝없는 딜레마에 봉착하는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어떤 물음표를 갈구한다. 인간은 과연 이성적 제도 너머의 본능적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가? <세븐 데이즈>의 7일간의 여정은 그 질문에 대한 딜레마적 답변과도 같다. 물론 인간은 죄의 원인 여부를 인지한다. 하지만 결국 그 징벌에 관여하는 법은 결과론적 증명으로 모든 걸 판단한다. 마지막 반전은 그런 의미에서 깊은 잔상을 남긴다. 과연 그녀는 또 한번의 변호를 맡았을까? ‘이번엔 제 변호를 맡아주시겠어요?’ 란 물음이 ‘과연 당신이 이런 상황에서 내 변호를 맡았겠어?’라는 회의적 태도로 느껴지는 건 결국 대가 없는 무모한 싸움에 그녀가 끼어들 만한 이성적 근거가 부족한 까닭이다. 목요일의 아이가 돌아온 이상, 그녀는 도박 같은 변호를 할 필요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어졌다. 결국 그 모성애도 개인주의 속에 내재된 표상의 일부일 따름이다. 어쩌면 <세븐데이즈>의 장르적 속성을 채운 건 그런 인물들의 내면이 드러나는 표정이었으며 그 표정의 진심은 그렇게 무심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마치 그 딜레마 같은 마지막 표정은 <세븐데이즈>가 -혹은 원신연 감독 자신이-노린 궁극적인 본심 같아서 처연하면서도 한편으로 오싹하다.
2007년 11월 6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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