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자들은 전쟁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극 중 대사처럼 우리는 전쟁에 무지하다. 그렇기에 전쟁이 기억되는 방식도 무지한 이해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간접 경험하는 긴박한 스펙터클의 쾌감은 전쟁을 관망하는 이의 무례함과 다를 바 없다. 육신이 으스러지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의 한가운데로 그런 쾌감이 연동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어느 노인의 회고적 음성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다. 성조기를 세우는 미군사진은 종군기자 존 로젠탈이 포착하여 퓰리쳐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하지만 사진의 순수한 가치와 무관하게 이는 허상의 이미지를 세우는 계기가 된다. 전쟁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영웅주의의 전시에 찰나의 이미지가 이용되는 과정은 씁쓸함 그 자체이다.
전장의 살 떨리는 리얼함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느꼈던 상륙전의 끔찍함을 상기시킨다. 날아든 포화의 파편과 공기를 가르는 총탄에 나약한 몸뚱이는 찢겨지고 뚫려나간다. 포커를 치고 농담을 나누던 전우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하는 것을 애도할 틈도 없이 살아남은 전우들은 적진으로 돌진해야 한다. 애국심으로 고취되던 명예는 전장의 공포로 변질되고 생존을 위한 살육전이 자행된다. 또한 단순히 전장의 외관만이 전시되지 않고 전장의 중심에 선 인간들의 경직된 심리가 전이된다. 어느 순간 날아들지 모르는 포탄 앞에 쉽게 부서지는 인간의 가치는 더없이 무력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인간끼리 살해를 자행해야 하는 전쟁터에서 발견되는 무기력한 개인의 가치는 서글프다. 국가라는 대의 안에서 소모되는 개개인의 몰가치한 현상은 거대한 대명제 안에 속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소수로써의 나약함에 대한 발견이다. 결국 이는 그 특별한 사진 한 장으로 인해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 스스로 짊어진 자괴감과 맞닿는다.
허구적인 영웅들을 내세워 전쟁의 정당성을 고취시키는 정부의 정책은, 사진 속 인물들 중 살아남아 본국으로 송환된 세 인물들이 전장에서 얻은 심적 생채기를 치유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성조기를 세우던 그 순간이 쇼처럼 천박하게 재현되는 순간 전장의 절규는 플래쉬백된다. 깃발 덕에 송환된 세인물이 본심과 무관하게 영웅으로 미화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아픔이 영광으로 변질되는 과정의 몰염치함을 본다. 명예로 고개를 들던 젊은이들이 전장의 공포 앞에 고개를 숙일 때 전장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는 파시즘과 프로파간다에 휘둘리고 내몰린 인간들의 나약한 비극이 핏물처럼 엉켜 흐른다. 단지 깃발의 영광만이 기념처럼 숭상될 뿐 그 아래 쌓인 주검들의 비극은 사소하게 잊히고 함구된다.
영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소모전이 부질없지 않다는 선전도구로 활용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개인의 가치는 이용된다. 추억이 될 수 없는 기억 안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남은 생애에도 고통의 생채기를 안고 살아간다. 깃발의 영광보다도 전우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훈장으로 가리려는 행위는 몰염치하다. 영웅주의의 허상은 그 현상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드러나며 현상 가운데 서 있는 이들의 아픔으로 전이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다. 우리는 승리를 기억할 뿐 승리에 묻힌 비극의 무게를 간과한다. 승패의 구분보다도 전장에서 사라진 목숨들에 주목해야 한다. 깃발에 현혹되기 전에 깃발 아래 파묻힌 이름을 살펴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전장의 공포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을 게다. 우리는 그들에게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전쟁에 대한 최선의 예우다. 기념이 아닌 추모가 선행되고 환호가 아닌 애도로 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기다려지는 것은 이 영화가 승자를 위한 전쟁담이 아닌 덕분이다. 승자와 패자의 흑백논리를 거부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과연 이오지마의 일본군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벌써 궁금하다. 거대한 군상의 대의를 미화하지 않고 군상 안에 갇힌 개인의 의지와 소명들을 소중히 끌어안은 노작가의 혜안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2007년 2월 16일 금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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