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따르면 과거 인간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대홍수 이후 인간은 신의 재앙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신의 영역인 하늘에 맞닿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다. 신은 인간에게 물로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는 무지개를 약속했으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의 오만함에 분노한 신은 인간에게 재앙을 내린다. 그 재앙은 바로 소통의 불협화음, 언어의 분리였다. 탑을 건축하던 이들은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결국 바벨탑은 붕괴된다. 그리고 인류는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다. 지금 세계가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고 세계 각지에서 각각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 바벨의 오만함 덕분이다.
물론 이는 성경말씀이다. 하지만 만약 세계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과연 인류의 역사는 어떠했을까라는 논점하에서 이 성경말씀은 큰 의미를 지닌다. 지난 수세기부터 근래까지 인간은 수많은 폭력과 갈등의 사례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갈등은 어디서 출발하며 어디로 나아가는가. 어쩌면 그것은 마치 인종과 국적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처럼 소통되지 않는 사고와 이념의 혼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단 이 영화가 숙주로 삼는 것은 서구와 아랍의 대립이다. 그 중에서도 9.11테러 이후 불거진 미국과의 전면전은 극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모로코의 소년들이 벌인 치기어린 장난은 먼 미국에서 관광을 온 수잔(케이트 블란쳇)의 몸을 관통한다. 여기서부터 사건은 산불처럼 번져나간다. 지루할 정도로 정적이던 모로코는 한발의 총성으로 인해 긴장의 국면을 맞이한다. 유약한 발단이 부른 심각한 사건을 미 정부는 테러리즘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 과녁을 향해 모든 추측을 던져 넣는다. 한편 모로코에서 펼쳐진 날갯짓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으로 바람을 일으킨다. 그 국경지대는 잠재된 인종의 갈등을 표면으로 드러낸다. 그 바람은 일본까지 파문의 동심원을 확장한다. 일본의 사정은 사실 전자들에 비해 액자 같은 배치이자 이야기의 연결에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목적을 다지는 방편이다. 마치 서구와 아랍의 대립구도에 끼어든 것처럼 여겨지는 일본의 사정은 결과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소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작품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셈이다.
물론 바벨의 이야기는 세련된 감각으로 관객에게 편안한 이해를 도모하지도, 극적인 리듬감으로 영화적 순기능의 재미를 얹어주지도 않는다. 서사의 순열이 어긋나고 공간의 교차가 반복되며 그 행간의 의미를 뚜렷하게 각인시키지도 않는다. 관객은 극간의 의미에 집중해야 하고 인물들의 고뇌를 읽어야 하며 뒤섞인 시공간을 자체 배열해야 한다. 불친절함에 분노하는 이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영화의 잘못이 아니다. 물론 영화의 이야기적 재미를 기대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허나 그 기대감을 이 작품에 대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왜냐?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적 재미로 폄하되지 못할 가치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어려운 문체의 단락들이 모여 하나의 글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놀랍지만 그 완성된 글이 담고 있는 주제의 명백함은 이 영화가 추구하는 우직함이다. 이나리투 감독의 전작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과 마찬가지로 무관계한 개개인들이 도미노처럼 엮이는 사건 속에서 하나의 관계로 휘말려가는 과정은 <바벨>과 비슷한 스토리텔링의 방법론이지만 감성이 절제되고 직설적인 논법의 호소로 나아간 것은 다른 측면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가 지닌 화두의 무게감이 중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생사의 나락을 헤매는 수잔이 외교적 볼모가 되는 순간들,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가 오랜 정을 나눈 아이들과 대면조차 못하고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들, 그리고 치에코(키쿠치 린코)의 상처 입은 감성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로 드러나는 순간을 목도할 때 우리는 소통의 불화가 이루고 있는 현실의 통증들과 맞닥뜨리고 느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우리가 쳐놓은 울타리의 규칙 안에서 우리는 얽매인 채 살아가야 한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쳐놓은 그물에 자신들을 가둔 셈이다.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감보다는 피부색과 국경으로 선을 긋고 경계한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마음에 개개인의 바벨탑을 세우고 있다. 국경과 민족, 그리고 너와 나. 그 탑 안에 갇혀 경쟁과 배척의 창 너머로 영역 밖의 인간을 바라본다.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의 지고지순한 가치는 몰락하고 마치 등급이 나눠지듯 동등한 인종끼리의 소통만이 도모된다. 그리고 그 갈등과 경계의 방침을 물려준다. 비극의 순환은 계속될 것이며 결국 우리는 그 굴레에서 머무르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쳇바퀴를 도는 셈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밖을 벗어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가를 인지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슬픈 것은, 이 같은 인간들의 편 가르기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신의 저주는 실로 무섭지 아니한가. 단지 언어를 흩뜨려 놓았을 뿐인데 인간은 하나의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으니 말이다.
2007년 2월 14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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