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승 감독의 <가을로>는 단순히 멜로영화로 정의하기엔 너무 많은 기억들을 담고 있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11년째인 올해, 시간의 간격은 크지만 고통은 여전함을 깨닫는다. 현우(유지태)의 여행길에 우리가 쉽게 동행할 수 있는 이유도 통증 없는 그 고통스런 기억 때문일 것이다.
현우가 부조리한 일상에서 일탈을 결심하고 여행길에 오른 순간 관객은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주인공이 10년 전 입었던 그 상처를 치료하게 될 것임을. 결국 스토리만을 가지고 현우의 여행에 관객들을 끝까지 동행시키기에는 어렵다.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역사적 상처는 주인공의 길 위에서의 모든 체험에 영화적 흥미로 정의될 수 있는 필연성을 안겨준다. 때문에 현우의 여행에는 다른 로드무비와는 다르게 눈에 보이는 목표가 정해져 있다. 그 목표는 현우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 관객 또한 서성이게 만든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특정 누군가의 상처로 기억되지 않기에 말 그대로 참사다. 우리의 시간 속에서 또렷이 각인된 그날의 사고. 가까운 누군가가 그 일로 인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폐허는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의 다른 이름이다. 우린 한번쯤 자신들의 죽음을 그 곳에 대입해 보았을 것이다. 민주(김지수)의 여행노트에 적힌 대로 길을 나선 현우와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만 살아있는 세진(엄지원)의 만남은 그래서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가을로>가 특이한 것은 과거의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두 남녀의 길을 미리 정해주었다는 데 있다. 현우와 세진이 발길이 머무는 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순례지에 가깝다. 끝나지 않은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연인을 추억하기 위해 그들은 길 위에서 서성인다. 서성이는 발길은 더 이상 여행이 아니다. <가을로>는 한 남자의 여정이 과거와 맞닥뜨리는 시간의 마술을 보여줄 뿐이다. <가을로>는 그래서 <번지점프를 하다>와 포개어진다. 세진은 민주의 환생이며, 현우는 세진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준다.
플래시백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지만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김대승 감독은, 시간에 갇혀 변하지 않게 된 인간의 진실한 감정을 쓸어 모은다. 현실에 겹쳐지는 과거의 고통은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통증을 잊어간다. 아픔이 잦아들면 변치 않는 사랑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영원한 사랑만이 남는다. 김대승 감독은 한 남녀의 아픔을 이처럼 불변의 낭만성으로 치유하려 든다. 실제에서부터 출발한 여행은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모호한 판타지로 끝맺는다. 인간이 만든 건물은 무너지고, 자연이 만든 천년된 전나무 숲은 그대로 존재하는 현실에서 감독은 현대인이 믿지 않는 사랑의 동화(童話)를 완성해 나간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백화점이 무너진 사고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난 비극이다. 정면으로 직시하기에는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슬픔이라 그런지, 김대승 감독은 10여 년 전의 그때를 만지작거리는데서 그쳤다. 영화 <가을로>는 삼풍백화점 붕괴를 아직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의 슬픈 외면이자 동화 같은 위로다.
글_ 2006년 10월 17일 화요일 | 최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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