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 개봉한 영화 <나니아 연대기>가 화제다. 마법의 옷장을 통해 신비로운 나라 ‘나니아’로 들어간 네 남매의 모험을 그린 이 영화는, C.S. 루이스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 원작은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함께 현대 판타지문학의 근간을 이룬 작품으로 꼽히는 명저다. 상당한 마니아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영화의 개봉과 함께 새 판본이 출판되면서 서점가를 완전히 휩쓸 정도로 현재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덕분에 방학과 연말연시 시즌을 맞은 극장가 역시 한껏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더불어, 이 기대의 근간에는 수년 전부터 한국의 겨울 극장가를 판타지 영화들이 독식하다시피 해왔다는 사실도 자리잡고 있다.
☞ 판타지 영화는 겨울에 보라?
흥미롭지 않은가?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던 한국의 관람풍토가 이렇게 일거에 변화될 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겨울과 판타지라니.
☞ 판타지, 대중을 만나다
판타지가 하나의 장르로서, 공식적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대중과 만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서구의 경우 영화의 출발과 함께 판타지가 하나의 장르로서 기능했지만, 딱딱했던 문학계에서마저 판타지를 하나의 장르로 인정한 것은 판타지 명저가 쏟아져 나온 1960년대의 일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변화를 맞은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예술의 양태도 변화한다고 했던가. PC통신과 인터넷 등의 기술적 변화와 함께 ‘통신 연재 소설’이라는 형태로 판타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퇴마록>,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등의 작품이 통신상의 텍스트를 거쳐, 책으로 출판되고 연이어 영화화되는 등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판타지는 보다 본격적으로 대중과 만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영화가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판타지나 SF물의 경우 유독 흥행이 어려웠던 극장가의 풍토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내세울 만한 작품을 지니지 못했던 과거와는 달리, 완성도의 논란은 있을지언정 <퇴마록>, <내추럴시티> 등 국산 판타지, SF 작품들이 관객을 만나기 시작했다.
☞ 시대와 세대의 변화
문학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 분야 전반에 걸쳐 사실주의적 가치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한국의 풍토 하에서 이러한 판타지의 득세는 어쩌면 상당히 이채로운 일이겠으나, 이는 시대의 변화가 이끌어낸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우리의 소통환경은 달라졌다.
가상현실 또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것이라 여겨졌던 것들은 이제 우리의 환경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엇이 되어 있다. 초고속 통신과 위성통신시설을 기반으로 낙도까지 인터넷이 연결되고 있으며, 핸드폰은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소유한 생필품이 되어 있다. 엄숙한 환경에서 자유로워진 독자와 관객들에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칠수와 만수>보다 <퇴마록>과 <해리포터>가 더 반가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학에서 시작된 판타지 바람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겨울 극장가를 뒤흔드는 최대의 코드가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환경적 요인의 뒷받침 하에 판타지 영화가 관객들 사이에서 보다 폭넓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한국의 겨울 극장가에서 유독 판타지 영화가 사랑받고 있는 현상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 계절적 요인과 시장성
애초에,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이 한 겨울이 아닌 한여름에 개봉일정을 잡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겨울의 판타지 열풍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해리포터> 시리즈 중 3편인 <아즈카반의 죄수>는 한여름에 개봉을 하기도 했다.
매해 여름마다 극장가를 전쟁터로 만드는 블록버스터들은 전쟁서사물에서 SF액션까지 아주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지만, 그것이 여름시장에 개봉되고 관객을 만나는 것은 관객층이 다양하고 넓은 여름시장이 보다 흥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그 작품들이 유난히 여름에 걸맞은 형식을 갖고 있어서는 아니다.
물론 계절이라는 요인이 갖는 시장적 특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다. ‘호러는 역시 여름에 봐야 제격’이라거나 ‘멜로는 역시 가을’이라는 식의 통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거니와, 방학, 추석 등 굵직한 소비대목이 존재하는 각각의 계절은 특유의 시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판타지가 겨울에 잘 어울리는 이유?
그러고 보면, 겨울만큼 판타지와 잘 어울리는 계절적 배경도 흔치는 않은 듯 싶다. 눈사람과 눈보라, 그리고 산타클로스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겨울은 보다 쉽게 대중을 현실로부터 떼어놓지 않던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마음 속에서 감각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환상(phantasie, 메츨러 사전)의 기본적 정의라 할 때, 겨울은 역시나 환상과 어울리는 계절인 셈이다. 눈의 여왕이랄지, 설인이랄지, 실존을 의심케 하는 많은 존재들이 바로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환상의 주인공들 아닌가. 또한 곧 개봉할 <나니아 연대기> 역시 마법에 걸려 겨울만 존재하는 세계 ‘나니아’가 등장한다.
더불어, 이 작품 <나니아 연대기>와 스크린으로 할 수 있는 시각경험의 최대치를 보여주었던 영화 <반지의 제왕> 모두 얼음과 추위가 일반적인 북유럽 신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추운 계절과 판타지의 조화도는 꽤 높은 편이다.
☞ 당신의 판타지를 즐겨라.
물론, '판타지 영화 겨울 우세론' 따위를 굳이 믿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호러영화는 여름에 봐야 제격’이라는 말과 같은, 일종의 통념일 뿐이다. 어차피 판타지는 영화의 출발부터 함께 해 왔고, 그것은 사실 영화가 가진 생래적 본질이기도 하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과 함께 초기 영화사의 기록할만한 작품으로 남은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을 기억해 보라. 달을 향해 발사된 로켓, 멜리에스가 보여준 것은 꿈과 환상, 모험과 경이를 향한 인간의 첫 영화적 원정인 동시에, 영화가 지닌 판타지로서의 기능과 본질이었다. 꿈, 환상, 모험, 경이. 사람들이 극장을 찾는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이제 중요한 것은 당신의 판타지이다. 영화제작자나 배급사가 아닌 다음에야, 언제 무엇을 보든 중요한 것은 ‘보는 내가 즐거운 것인가’이지 ‘남들도 이것을 보고 있는가’가 아니지 않은가. 자, 이 겨울, 남은 일은 하나다. 당신의 판타지를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