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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에 가장 충실한 판타지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jimmani 2005-12-29 오전 1:53:19 3835   [14]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발상은 나이를 막론하고 가슴 설레는 감정을 안겨주는 생각이다. 이미 <몬스터 주식회사>에서 그 상상을 간접 체험해 본 사람으로서, 정말 생각만 해도 절로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된다. 10cm도 채 되지 않는 문을 경계로 지금 발을 내딛고 있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상상은, 어쩌면 지독하게 힘든 현실을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맛을 가진 상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판타지라는 장르가 지금같은 시기에 왜 전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충분히 가늠해 볼 만하다.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하 <나니아 연대기>)은 그 설정 만으로 현대인들의 마음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반지의 제왕>처럼 완전히 딴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험도 아니고,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마법에 관련된 특출난 능력을 타고 나야지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뭣도 모르고 옷장에 들어간 현실 속 평범한 아이들이, 타고난 능력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이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에서 겪는 모험을 보여준다. 그저 평범한 옷장 하나로부터, 모든 거대한 모험은 시작된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보다 영화화 시점은 꽤 늦었지만, 이런 매력적인 설정은 비록 늦게 나타났어도 그 어떤 지장을 주지 않는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쑥대밭이 되어가던 영국. 피터(윌리엄 모슬리), 수잔(안나 포플웰), 에드먼드(스캔다 케이니스), 루시(조지 헨리) 등 페벤시 가의 4남매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어머니와 떨어져 커크 교수(짐 브로드벤트)의 집에 맡겨진다. 맥그리디 부인의 엄격한 규율 아래 조용히 생활하던 4남매는 어느날 심심함을 이기지 못해 숨바꼭질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막내 루시는 베일에 싸여 있던 옷장을 발견하고, 그 옷장 속으로 무심코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그 옷장 너머에는 나니아라는 듣도보도 못한 거대한 세계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루시는 그곳에서 상체는 인간, 하체는 짐승 모양을 하고 있는 툼누스라는 친절한 파우누스(종족의 한 종류)를 만나게 되고, 나니아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루시는 나머지 세 남매를 나니아 세계로 불러들인다. 이윽고 나니아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4남매. 이들은 이 곳에 사는 비버 부부로부터, "아담의 두 아들들과 이브의 두 딸들이 하얀 마녀를 물리치고 기나긴 겨울을 끝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그 아담의 아들들과 이브의 딸들이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말도 안되는 사실 앞에서 집으로 바삐 돌아가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엎질러진 물. 아무것도 모르는 이 4남매는 거대한 나니아 세계의 흥망이 달린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데...

사실 이 영화가 개봉 전부터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책으로 큰 인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아직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현재 이 영화에 쏠려 있는 관심은 대단하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반지의 제왕>을 잇는 판타지 시리즈"라는 많은 언론들의 이야기때문이 아닐까 싶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워낙에 전세계 영화팬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지나갔기에.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정통으로" 이을 영화는 아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시리즈의 비교가 합당하지 못한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이 <나니아 연대기>는 <반지의 제왕>의 뒤를 잇겠다고 하기에는 스케일이나 스토리의 무게가 좀 덜하고, <해리 포터>의 뒤를 잇겠다고 하기에는 그 세계관이 상당히 방대하고 스케일도 그보다 더 크다. 그런 점에서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시리즈의 중간 타겟, 혹은 두 시리즈의 타겟 관객층을 모두 아우르는 정도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반지의 제왕>을 기대하고 영화를 봤다가는 꽤 실망할 가능성이 많다. <반지의 제왕>과 같이 육중한 스케일, 질펀한 전투신들이 많이 나오는 성인용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아기자기하고, 보다 밝으며, 이야기 구조도 덜 무겁고 덜 복잡하다. 그런 점에서 <반지의 제왕>보다 얼마나 더 잘났는가 하면서 보기 보다는, <반지의 제왕>과는 어떤 다른 매력이 있는가를 중점으로 보시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우선 영화는 한 거대한 세계를 놓고 선악의 세력이 다투는 거대한 이야기 구조 속에, 아기자기한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를 첨가했다는 점이 특징 중 하나이다. 좀 유치하게 보일지 몰라도, 대장부 기질을 보이면서도 좀 게으른 비버 남편과 인자한 비버 아내가 부부를 이루기도 하고, 늑대들이 비밀경찰이 되어 음흉한 눈빛을 마구 내뿜기도 한다. 오크나 엘프, 난쟁이와 같은 가상의 인간형 종족들과 함께 비버, 늑대, 사자, 치타, 매, 코뿔소 등 동물들이 인간들과 동등하게 서로 어우러져 한 세계를 형성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특히나 사자왕인 아슬란(목소리 연기 : 리암 니슨)이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킹콩> 이후로 요즘 동물 캐릭터들이 너무 멋지게 나온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 내공이 압도적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어떻게 온전히 만들어냈을까 싶을 만큼 털이 부슬부슬한 사자 특유의 푹신한 느낌(보기에), 거기에 현명한 성격이 물씬 배어나오는 눈빛과 우아한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주인공인 4남매 옆에서 <대장금>의 임현식 씨와 금보라 씨 커플 마냥 잔재미를 더해주는 비버 부부, 특유의 위엄으로 인간들마저 압도하는 사자왕 아슬란처럼 인간 캐릭터들 못지 않게 그 옆에서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동물 캐릭터들이 일단 눈길을 사로잡았다. 분명 어린이 관객들에게 확실히 어필할 만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동물 캐릭터들만 활약을 해서 유치함만 더해주느냐, 그것도 아니올시다. 인간 캐릭터들 중에서는 단연 그 대단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사로잡는 이가 있으니 바로 하얀 마녀, 제이디스(틸다 스윈튼)다. 애초에 니콜 키드먼이 이 역할로 물망에 올랐다고 하던데, 틸다 스윈튼이 보여준 제이디스의 모습은 그 뒷이야기는 금세 잊어버리게 할 만큼 포스가 강력하다. 40을 훌쩍 넘은 배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뭔가 차갑고 도도하여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등장할 때마다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몸짓 하나하나, 대사의 악센트 하나하나까지 하얀 마녀가 진짜 현신한다면 보여줄 수 있을 그 우아하면서도 냉혹한 카리스마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힘없는 어린 아이를 담보로 잡아 세계를 손에 넣으려는 악당임에 틀림없어도, 그녀가 보여주는 오뉴월 서리와 같은 강력한 얼음 포스는 만만치 않은 흡인력을 보여줘서 다음 편에도 또 나와 줬으면 하는 바람이 강력히 생길 정도였다. 역시 매력적인 악역은, 정의의 편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관객을 영화에 몰입시키는 중요한 힘이 된다.

비주얼 적인 면에서도 기대를 충족시킨다. 사실 예고편에 나오는 스펙터클한 볼거리들은 주로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고, 전반부, 중반부는 평범한 아이들이 나니아에 들어서고, 자신들의 운명을 자각하기까지의 과정이 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100년동안 겨울만 반복되는 나니아답게, 스크린 전체를 뒤덮는 눈밭, 얼음밭은 진짜 이 영화가 겨울에 딱 어울리는 판타지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끔 만들었다. 눈이 되어 얼어붙은 드넓은 강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절로 속이 탁 트였고, 에드먼드가 헤매는 하얀 마녀의 성 내부의 모습은 차갑지만 너무나 푸르러서 그 맑은 빛깔에 절로 빠져들 정도였다. 후반부 전투신도 전체 관람가 등급이라 유혈 낭자, 리얼한 부분은 많이 배제되었지만 그 드넓은 평원을 배경으로 두 세력이 맞부딪치는 전투신이라 이전 영화들 못지 않은 스펙터클의 전율이 느껴졌다. 평원과 바위 사이를 가리지 않는 두 세력의 시원시원한 전투는 이 영화 한 켠이 차지하고 있는 아기자기한 재미와는 또 다른 꽤 선굵은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판타지"라는 장르가 문자 그대로 "환상"을 담고 있는 장르이니 만큼, 현실과의 연관성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할 것이냐는 꽤 큰 고민거리가 된다. 말그대로 환상이니만큼 현실과는 확연히 떨어진 뭔가를 담고 있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현실과 어느 정도 이어져야 할 것인가, 이 둘 사이에서 영화 제작자들도 꽤 고민을 할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현실과 완전히 독립된 판타지 세계를 그리면서도, 그 속에 현대 사회 인간들이 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권력에 대한 헛된 욕망 등)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또한 호그와트라는 정말 이상적인 마법 학교가 있으면서도 방학만 되면 해리가 사촌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환상과 현실을 어느 정도 혼합해 놓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나니아 연대기>의 판타지는 현실과의 다리는 이어놓고 있으면서도, 그 다리는 언제든지 끊을 수 있으며, 일단 끊으면 환상 속의 세계는 현실과는 달리 동떨어진 우리를 향한 모든 제약을 풀어놓은 가장 멋진 세계가 된다. 이 영화의 배경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이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영화는 현실에 어느 정도 다리를 놓고 있다. 아이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전시상황 속에서 교수의 저택으로 도피하게 되고, 그곳에서 신비한 세계로 통하는 옷장으로 통하게 된다. 나니아라는 그 신비한 세계는 말하는 동물들, 인간과 짐승의 모습을 함께 가진 종족 등 흥미로운 것들이 수도 없이 많고, 자연이 선사해주는 무공해의 경치는 보는 그 자체로 감동을 가져다준다. 주인공들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도 있으니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순 없다.

그러나 역시나 현실의 상황이 어느 정도 판타지 세계에는 반영이 된다.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4남매는 전쟁을 피해 피신해왔고 맥그리디 부인의 호통이 두려워 옷장에 숨었지만, 옷장 속 다른 세계로 오니 역시나 전쟁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나약한 어린 아이들에 불과한 현실과는 달리, 이 나니아 세계에서 이들은 엄연한 주인공이 되며, 현명한 지도자의 바른 판단 아래 마음껏 그들이 원하는 대로 활약을 펼친다. 같은 전쟁 상황이라도 판타지 세계 안에서 4남매는 보다 용감하고 굳건한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속 나니아 세계는 판타지가 우리에게 해야 할 역할을 가장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지독한 현실을 잠시나마 도피해보고 싶고, 현실과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서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되는 그런 기능 말이다.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만든 판타지란 장르에서, 현실이 또 다시 반영된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나니아 연대기>는 우리를 맹렬한 현실의 공격으로부터 잠시나마 방어해주는 판타지 본연의 임무를 가장 충실히 해내는 쪽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이들이 나니아 세계에서 즐기는 모험은 현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나니아에서 몇 시간을 있든, 몇 십년을 있든 옷장 밖으로 나오면 옷장 밖으로 들어가고 단 몇 초 후가 지난 현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아직 배경 설명과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워밍업으로 그 거대한 세계를 확실히 보여주지 않은 것이 분명한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이러한 희한한 시간 체계를 앞세워 우리를 나니아 세계로 초대한다. 나니아 세계에서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든, 현실 세계는 단 1초도 낭비되지 않는다. 거기다 올 수 있는 수단은 거창한 교통수단이나 귀중한 마법이 깃든 물건도 아니고, 그저 집안에 있는 옷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환상적인 세계로 오지 않으시겠다? 확실히 손해보는 거지. 영화는 이렇게 우리를 향해 옷장 문을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 몇년 동안은 계속 열어놓을 것이다.


(총 0명 참여)
clublee
와웃..필이 확 꽂히는 글쏨씨 대단해요~   
2006-01-06 13:10
toyoto
잘 쓰셨네요. 님의 필력이 부럽습니다   
2005-12-29 21:50
rosunghan
와! 긴 글이지만 후딱 다 읽어버렸어요! 글 너무 잘 남기셨네요. 같은 영화를 봐도 역시 생각하는게 남다르셔서 부러워요. 아직까지 제대로 된 후기 한번 못 써보고 있는데..-_-   
2005-12-2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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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 The Chronicles of Narnia : The Lion, the Witch & the Wardrobe)
제작사 : Walt Disney Pictures / 배급사 : 브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수입사 : 브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 공식홈페이지 : http://www.narniamovi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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