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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힘내세요. 그리고 뒤돌아 뛰어요! (영화 <방문자> 평) 방문자
moshe76 2006-11-17 오전 9:13:05 1443   [9]
 

아빠 힘내세요. 그리고 뒤돌아 뛰어요!


- 영화 <방문자> 평 -

홍한성


    영화를 보고 나오면 귀에 어른거리는 음악이 있다. 이 영화의 경우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였다. 인상적인 삽입곡으로 <곰세마리>도 있고 <Blowing In The Wind>도 있었는데 왜 굳이 그 음악일까? 아마 신용카드 광고에 쓰였던 <아빠 힘내세요>를 “우리가 있잖아요”에서 팔아먹을(?) “장기(organ)가 있잖아요”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패러디한 감독의 위트가 인상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는 이런 패러디와는 또 다를 뿐더러 신용카드 광고와는 정반대다. 마치 ‘돈 없다고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힘내세요. 아빠가 옳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극장의 출구로 흘러 나와서 거리의 한 가득한 사람의 물결 속으로 합류한다. 물결, 술렁이는 파도와 같은 사람의 흐름. 사람들은 걷고 또 이야기를 하고 껌을 씹고 음악을 듣고 있지만 왜 난 이들이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육상선수들로 보일까. 왜 전력으로 달리고 있지만 결코 일등이 될 수 없는 수많은 낙오자들로 보이며 수많은 “호준”들로 보일까. 궁금한가? 창을 열고 거리를 보라. 길은 강으로 보일 것이다. 지류들은 끊임없이 본류로 합수되어 큰 물줄기를 이루고 도도히 흘러간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욕망의 흐름. 이 흐름은 어느 구석진 모퉁이에서 물방울로 멈춰있는 당신마저 끌어들여 점점 자신을 키워나간다. 그 흐름 속에 영화학 시간강사인 “호준”은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떡거리며 뛰어가고 있다. 그는 전위적인 영화감독을 꿈꾸었지만 지금은 대학에서 지식을 파는, 요새 세상에 그 흔하디흔한 시간강사, 요컨대 비정규직 노동자 - ‘개털’이다. 고색창연한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룸펜 프롤레타리아?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아들 “건”에게 멋진 아빠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그는 이제는 강의마저 위태위태해, 작은 원룸에 유폐될 위험에 처해있다. 음란 동영상을 보면서 자위를 하고, 담배를 사러 나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구멍가게 아낙에게 영화 이야기를 하며 소통을 하고자 하는 헛된 시도가 그의 일상이다. 이런 단조로움과 소통불가능성 속에서 자동차를 팔아 생긴 돈으로 구입한 ‘출장맛사지사’의 흐벅진 육체상품은 오히려 빼빼마른 구매자 “호준”의 몸과 대비되어 그의 맥없는 사정을 더욱 허무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자가 너무 친근하지 않은가? 그 비밀은 영화 속에 있다.) 이렇게 “호준”은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한참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헐떡대고 있는 자랑스럽지 못한 아빠다.


    그런 그가 정말로 유폐된다. 그것도 알몸으로 화장실에서. 계절은 늦가을이고 돈을 안 냈을까? 더 이상 온수도 안 나오는 듯 그는 추워 보인다. 그는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다.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호준”은 자신이 꿈꾸었던 영화들을 중얼대면서 도와달라고 맥없이 웅얼대는데 마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방문하는 “계상”이 그 앞을 지나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들어와 고장난 화장실 손잡이를 망치로 두들겨 부순다. 마침내 신경질적인 “호준”은 사랑과 여유가 가득한 청년 전도사 “계상”에 의해 구조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계상”은 “호준”의 마른 몸에서 아버지를 느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된다.


    “호준”은 인사불성의 상황에서도 보아야 한다고 중얼대던 우작의 영화를 보러 “계상”을 데리고 간다. 극장에서는 호전적인 “호준”의 성격 탓에 한 번의 실랑이가 지나간다. 영화를 보다가 나와 앉은 벤치에서 “계상”은 종교를 이유로 오해를 받고 과외를 잘렸다고 말한다. “호준”은 옛 대학동창회에 간다.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인 이들은 학창시절에는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을 법한데 얘기하는 주제는 온통 돈 뿐이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는가가 중심 주제이며 돈을 많이 번 동창이 존경받는 분위기에서 “호준”은 말없이 술만 마신다. 다음날 집에 돌아온 “호준”이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강의가 취소되었다는 우편물이다. 착잡한 기분으로 방문을 여니 “계상”이 그 망치를 들고 화장실 문을 고치고 있다. 다시는 안에 갇히는 일이 없을 거라면서. 과외를 잘린 소수종교 “계상”과 강의를 잘린 시간강사이자 아버지의 자리에서 잘린 “호준”은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택시에 합승한다. 택시에서는 먼저 타 있던 기독, 보수, 친미적 성향의 중소기업 사장과 “호준”의 격투가 벌어진다. 이런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은 두 사람의 성격을 서로 배경삼아 일상적이지 않은 의미들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결코 당연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호준”을 이해하게 되는 “계상”은 “난 그날까지 형과 함께 할 거야”라는 말을 한다.


    친해진 두 사람은 함께 가평에 있는 “계상”의 집, 고엽제 후유증으로 남편이 죽은 후 단 한 번도 가평을 떠난 적이 없는 “계상”의 어머니에게로 찾아가 “계상”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소년시절의 다락방에서 “호준”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성장하고 있는 어린 “계상”을 느끼게 되고 찌든 서울에서의 삶을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수돗가에서 김을 모락모락 올리며 세수를 한다. 가평의 목가적인 풍광은 영화에서 가장 서정적인 장면들을 보여준다. 저녁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호반의 낙엽 지는 가을풍경 속을 걸어오면서 종교와 삶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데 이 씬은 마치 두 사람의 인생 동행길을 표현하려는 듯 저 멀리서 대화하며 걸어오는 장면을 컷 없이 롱테이크로 담아냈다. 전원의 밤에 “호준”이 기타연주와 함께 <Blowing In The Wind>를 부르고 “계상”은 따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둘은 서로를 변화시키는데 “호준”은 “계상”에게 완전한 신이 아닌 불완전한 사람을 믿는 방법을 보여주고 “계상”은 자신을 이단시하는 지배적인 시선에 굴하지 않는, 그 어떤 것의 영향에도 지켜나가는 신념의 기원과 현재를 보여줌으로써 ‘한때’ 운동권이었던 지친 “호준”을 자극한다. 서울에 올라온 달라진 “호준”은 아들의 사진을 벽에 걸고 다시 이력서를 쓴다. 밥때가 되어 라면을 먹는데 ‘출장맛사지사’가 정액 묻은 물티슈를 “부시”의 얼굴에 올려놓았던 것처럼 “호준”은 불어터진 라면 면발을 “부시”의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그 뒤의 씬은 “계상”의 병역거부로 인한 재판이 열리고 있는 법정이다. 앞부분과 이 부분의 연결이 다소 갑작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영화문법의 미숙성이라기보다는 호반에서의 장면들이 너무나 함축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녀와 같은 “계상”의 어머니를 “호준”이 보좌하는 앞에서 “계상”은 형을 언도받는다. “계상”은 국가유공자 자녀가 되어 한 달간의 훈련만 받으면 복무가 면제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반전과 평화의 메세지를 낮고 느린 그러나 신념에 찬 강한 어조로 진술한다. 이 부분은 앞서 호반의 장면과 함께 롱테이크로 찍은 장면으로서 배우 강지환의 깊은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결국, “계상”은 수감되고 “호준”은 법원 옆의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구토를 한다. “계상”의 신념으로 인해 일어나는 “호준”의 변화가 현재 진행형이라면 “호준”의 활동으로 인해 변화하는 “계상”의 변화는 미래형이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호준”은 아들을 데리고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자신의 삶의 모습들을 보여준 다음, 수감되어 있는 “계상”을 찾아간다. 밖에서 잠그게 되어 있는 면회실 문을 열고 들어가 “호준”은 “계상”에게 자신의 아들 “건”을 보여준다. “계상”은 “호준”이 차입한 책을, “호준”은 “계상”이 두고 간 책을 읽으며 앞으로의 변화를 예고한다. “삼촌 거기서 못나와?” 라는 “건”의 물음에 답하듯, “호준”은 “계상”에게 “이번엔 내가 너를 꺼내줄게”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동네로 돌아와 프로파간다적인 이데올로기 표지판을 부수고 땅에 묻어 맨발로 흙을 다지는 “호준”은 자신과 “계상”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활동을 할 것으로 예상되며 “호준”은 “계상”이 넣어준 책을 읽을 것이다.  즉, “계상”은 “호준”에게 사랑과 신념을 주었고 “호준”은 “계상”에게 사회과학으로서의 세계인식을 주는 것이다.


    신동일 감독은 이미 2001년 <신성가족 ; The Holy Family>이라는 단편으로 깐느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바 있는데, 이 단편의 제목에서처럼 그는 이 영화에서도 “호준”의 사회주의적 감수성과 “계상”의 신학적 감수성을 적절하게 접합하고 있다. 이는 낯선 주제가 아니다. 이미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에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투쟁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된 혈맹단의 수장이자 현실세계의 메시아 “사반”과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짊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하늘나라의 메시아 “예수”가 등장 한 바 있다. 그러나 김동리의 소설에서 두 사람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평행선을 그리는데 반해 신동일 감독은 두 세계관을 접합하고 있는 것이다. “호준”과 “계상”은 각각 “사반”과 “예수”에 비견된다. “호준”의 마른 몸은 빈곤과 절제, 황폐성과 함께 근육질의 단호함과 투사적 성질을 보여준다. 그는 유물론자이며 혁명을 믿는다. 화장실에서 구출된 “호준”이 침대에 누워있는 모양은 그 빼빼 마른 몸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예수”-라기 보다는 “사반”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따라서 “계상”에 의해 구원되는 “호준”의 화장실 유폐는 성경에서 예수의 옆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구원을 받은 도적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 더구나 공원 언덕에서 “호준”은 자신과 같은 묶인 존재들, 그러나 방문자를 바라지만 방문하는 사람들이 없어 고사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서울에 십자가가 ‘존나’ 많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계상”은 노동자(목수)였던 예수처럼 망치를 들고 “호준”을 구하며 그를 죽음에서 꺼내준다. 예수가 라자로의 육신을 부활시키고 도적의 영혼을 구원했듯이 이는 “호준”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계상”이 구하게 될 것이란 것을 의미한다. 그의 도구는 신성이며 동시에 망치이다. 망치는 일을 하는 도구인 동시에 지배자를 공격하는 무기로서 구 소련의 국기에서 보듯이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신동일 감독이 이에 덧붙인 것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서의 의미인데 이에 의해 망치는 사회학적-신학적인 도구가 된다. 사실, 신학적인 존재인 예수의 직업은 망치를 든 목수로서 노동자였지 자본가가 아니었다. “계상”의 말에 의하면 “호준”을 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계상은 그 망치를 다시 화장실 문을 고치는 데 사용하는데 “호준”은 이를 보고 “너 목수해도 되겠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계상”은 종교적 규율을 어기는 음주에 있어서도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도그마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 율법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예수 상징성을 더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에 있어서 “계상”은 아버지를 파멸시킨 제국주의적인 도구-총을 잡기를 거부하고 망치를 택한다. 이 같은 선택은 “호준”이 마지막에 ‘총기’은닉장소라는 팻말을 깨고 신도 벗어 작은 유리조각에도 비무장인 맨발로 그것을 파묻고 다지는 모습으로 재현된다. 이것은 시니컬한 태도로 총기은닉장소에 오줌을 누던 “호준”이 보다 긍정적이고 실천적인 “계상”의 방식을 선언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의 배경음악인 <Blowing In The Wind>와 함께 들리는 공사현장의 망치 소리는 “호준”이 행할 사회적 행위가 노동에 기초한 것임을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인물 감정의 변화가 관객의 따라갈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으며 영화의 진행에 의한 것이겠지만 인물의 변화가 너무나 갑작스럽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영화 각 부분의 유기적 연결이 떨어지는 느낌은 감독에게 조금 더 관객의 입장에서 전체적인 맥락을 갖고 작업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무명배우 캐스팅, 1억 3천의 제작비와 19명의 스텝, 13차의 촬영만으로 만들어졌다는 제작 환경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또한 그에게 온전한 제작 시스템이 주어진다면 이러한 단점들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성공을 거둔 차기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보여준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의 가능성은 여성의 부재에 있다. 일상적인 모습의 여성들 외에는 이웃에 살고 있는 ‘출장마사지사’가 작품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호준”-아버지-현재와 “계상”-아들-미래라는 두 남성 주체의 상호 변모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설정일 수 있다. 게다가 영화의 상투적 구조로서 남성인물들의 매개항으로만 기능하는 여성인물을 과감하게 삭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진보적일 수 있지만 여성에 대한 관점, 성을 다루는 방식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바 없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선택과 배제의 관점에서 남성만을 다루고 있는 것인지 정치적 가능성을 남성에게서만 찾고 있는 것인지는 차기작들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걱정이 기우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전작에서 이미 가족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사회주의 고전 <The Holy Family>를 따왔다는 점, 그리고 차기작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우정으로 왜곡된 남성의 이성애와 이를 허용하지 않는 여성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작품 하나만을 본다면 역시 사회적 지배구조를 둘러싼 담론에 남성 유대와 아버지-아들간의 관계만이 등장한다는 것은 남성의 공고한 제국을 세우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감독에게 이런 사회적인 이야기들을 여성의 입장에서도 풀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문한다면 욕심일까? 감독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여성성에 대해 올바른 정의를 내리고 있는지를 자문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을 <아빠 힘내세요. 그리고 뒤를 돌아 뛰어요!>라고 붙인 것은 이 영화를 지배하는 시선이 아들의 시선, 아니 그 아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는 아버지의 자의식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래서 호준의 자의식, 아버지의 자의식을 갖게 된다. 아들은 미래의 세대를 말한다. 결국 영화는 미래에 대한 현재의 책임의식에 강하게 지배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뒤를 돌아 뛰라는 말은 무엇인가. 퇴행은 아니다. 사회는 개인들이 각자의 영향력을 발산하고 있는 하나의 복합적인 장(field)이며 이 장에는 여러 가지 힘들이 작용한다. 그 중에 그 구성원들의 다수성과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배적인 힘을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지금의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보이는데 이 이데올로기 하에서 그 구성원들은 이윤추구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필연적으로 서열화 된다. 예술영화를 보러 올 정도로 고급의 취향을 가진 우리들-현재의 존재-아버지들은 “호준”과 같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욕망의 흐름 속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계상”으로 인해 “호준”이 뒤를 돌아보았듯, 그리고 자신이 후미가 아니라 전위에 있음을 깨달았듯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만약에 뒤로 돌아 달리는 것이 재미있고 보람 있으며 올바른 것으로 느껴진다면 이 영화는 정치성을 미학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 있어서 성공한 셈이다.


    흘러가는 강물에서 제자리 수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지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가치중립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정치적인 구호에 간여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간파하고 당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만큼 ‘반’ 혹은 ‘탈’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이 영화의 메세지가 연어처럼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라는 것인지 ‘횡단’을 하라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직각의 횡단을 하기 위해서는 상류 쪽으로 어느 정도 헤엄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살이 급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는 횡단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그것은 ‘걸어가다 보면’ 되는 일도 아니며 당장의 작은 실천들의 합이다. 영화가 당신에게 주는 메세지, <방문자>는 그런 의미에서 당신에게 다가온 ‘방문자’이며 당신의 감상과 품평 또한 감독에게는 ‘방문자’가 될 것이다. 진정한 변증법적 삶이란 누가 누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과 ‘반’이 서로 변하여 ‘합’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호준”과 “계상”이 서로를 변화시켰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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