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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 가능성 없는 세계가 유지되어야 하는가? 설국열차
ldk209 2013-08-06 오후 1:50:06 11647   [5]

 

개선 가능성 없는 세계가 유지되어야 하는가? ★★★★

 

※ 영화의 주요한 설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다 시피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인간의 실수로 인해 도래한 빙하기에 거대한 순환선을 타고 달리는 기차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류 사이에 일어난 혁명(!)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하여도, 그리고 다른 뭔가가 숨겨져 있다 해도 영화의 전반부를 감싸고도는 건 억눌린 자들이 부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을 상대로 떨쳐 일어선 혁명 그 자체다. 빙하기 도래 이후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 번째 일어난 혁명.

 

누군가 지적했지만, SF 장르는 어떤 영화든지 대게 현실에 대한 우화, 현실 비판으로 읽히곤 한다. 물론 가끔 해석 과잉이 거슬리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어쩌면 그게 SF 장르의 태생적 한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심지어 최근 개봉한 <퍼시픽 림>에서조차 외계인이 지구정복에 나서게 된 건 온난화 등으로 인해 지구 대기가 자신들에게 적합하도록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현재의 지구 환경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안 읽을 도리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설국열차>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한 한 평론가의 진단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 평론가는 <설국열차>의 하루 앞당긴 변칙 개봉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개봉일자를 앞당기는 신자유주의적 선택을 하였다”라는 식으로 트위터에서 비판하였다. 그 때는 영화를 보기 전이긴 했지만, 그래도 매우 의아했다. 배급사도 아닌 감독에게 개봉일 변경을 비판하는 것도 우습긴 했지만, 과연 <설국열차>에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건덕지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빙하기로 모든 게 얼어붙어 살아남은 인류가 모인 기차, 한 명의 독재자에 의해 유지되는 유일 체제에서 신자유주의라니? 누구 말대로 신자유주의가 몰락한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영화 속 디스토피아의 세계일 텐데 말이다.(악이 몰락했다고 꼭 선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악이 올 수도 있고, 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해 ‘구관이 명관이다’는 체념을 낳기도 한다. 또 많은 경우에 알고 봤더니 몰락한 악이 자신의 이익에 더 부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물론, 만약에 체제 유지를 위해 꼬리칸 사람들을 상대로 무한 경쟁을 유발해 매년 소수의 인원을 선발, 앞칸으로 신분 상승하도록 하는 시스템(소위 사다리)을 가동한다면 그나마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봐 줄 여지가 있겠지만, 열차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전혀 달랐다. 그리고 이게 바로 마지막에 밝혀지는 <설국열차>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심지어 이 체제는 꼬리칸 사람들에게 노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아무튼, <설국열차>는 내가 생각한 방식의 영화는 아니었다. 꼬리칸에서 엔진이 있는 맨 앞칸을 점령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고, 앞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간다는 스토리에서 기대할만한 것을 영화는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참 의아했다. 내가 뭘 기대했을까? 아마 대게 앞칸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어려운 미션이 등장할 것이고, 그것을 클리어했을 때 얻어지는 쾌감? 그런데 영화는 이런 상승 구조 대신에 병렬 구조를 택하고 있다. 실제 기차의 각 칸이 별개로 존재하듯이 말이다. 혁명의 깃발을 들고 첫 문을 확보하고 감옥칸까지 밀고 올라갔을 때만해도 긴장감으로 팽배했던 영화는 열차의 보안시스템을 설계했다는 남궁민수(송강호)가 합류하면서부터 묘하게 긴장감이 풀어진다. 게다가 앞으로 올라가는 데 따르는 어려움도 거의 없다.

 

대신 영화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어떻게 생활이 가능한지 그 생태계를 보여준다. 주로 먹거리를 중심으로 교육, 오락 등, 하나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가동되는 핵심적인 시스템들, 바로 세계의 축약인 것이다. 심지어 <설국열차>의 세계에선 혁명조차 시스템 유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설국열차>는 크게 봐서 궤도 자체가 순환이긴 하지만, 기차 역시 앞칸과 꼬리칸이 연결된 순환구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엔진이 있는 맨 앞칸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병렬적이고, 난이도가 낮으며, 게다가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수준이라 사람에 따라 조금 지루해할 여지가 있지만, 기차의 각 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미지와 특성은 그런 지루함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을 만큼의 흥미진진함과 재미를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설국열차>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혁명? 분명히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알고 보면 혁명은 그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토대, 어떻게 보면 그저 맥거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설국열차>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췄다고 해도 <설국열차>는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설국열차>는 새로운 차원, 영역으로 넘어선다. 새로운 차원의 질문. 왜 현재의 시스템이 유지되어야 하는가? 현재의 세계가 개선 가능성이 없다면 그 세계는 과연 유지될 필요가 있는가? 지구 온난화 폐해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인 북극곰의 생존이야말로 어쩌면 그 대답이 될 것이다.

 

※ 영화를 끌고 가는 주요한 인물들의 퇴장에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애정이 담겨져 있지 않은 퇴장. 난 이 부분을 영화의 단점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 얘기를 했더니 누군가 시스템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물들의 죽음이나 퇴장을 부러 그렇게 별 것 아닌 일로 만든 거 아닐까 하는 해석을 내 놓았다. 그랬을 수 있지만, 그래도 내겐 아니다.

 

※ 전반적으로 적격 캐스팅인데, 애드 해리스는 좀 아쉽다. 너무 스테레오 타입 캐스팅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처음 윌포드 역에 더스틴 호프만이 유력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불발됐다고. 더스틴 호프만이었다면 확실히 더 좋았을 거 같긴 하다.

 

※ 크리스 에반스, 존 허트, 틸다 스윈튼, 제이미 벨, 옥타비아 스펜서, 송강호 등 배우들이 보여준 연기는 <설국열차>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가장 놀랍고 반가웠던 건 알리슨 필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노래와 안무, 거기에 똥그랗게 뜬 눈이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이 영화의 씬스틸러를 꼽자면 알리슨 필이 아닐런지.

 

※ 틸다 스윈튼의 틀니, 무시무시한 새해 카운트다운, 1인칭 시점의 야간 투시경 전투, 양갱의 비밀, 그리고 북극곰.

 

※ 고아성. 참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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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2013, Snowpiercer)
제작사 : (주)모호필름, 오퍼스픽쳐스 / 배급사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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