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큰 수확은 바로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한국 감독들의 선전이다. 물론 김지운 감독의 <라스트
스탠딩>은 그닥 많으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할리우드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박찬욱 감독의 경우
할리우드에서도 독특한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을 그대로 선보이면서 역시 박찬욱이라는 호평을 이끌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뿐이다.
9년의 준비기간, 450억원의 예산과 <어벤져스>에서 캡틴 아메리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 크리스 에반스,
<케빈에 대하여>의 틸다 스윈튼이 영화에 합류하였고, 봉준호 감독은 한국 배우로써 최고의 연기력을 가지고 있는 송강호와
고아성을 선택했다. 아마 영화가 개봉하기 전 우리가 영화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들 중 이렇게 가슴 설레게하는 이야기들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현재 <설국열차>는 최고의 흥행가도를 거침없이 달려 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멈추기 위해 오랜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발된 CW-7. 이 CW-7은 실패하고 지구에 빙하기를 불러온다. 지구에 최후의
생존지는 오직 끊임없이 달리는 '설국열차'인데, 지구에 빙하기가 온지 17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기차는 생존자들을 태우고
달리고 있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는 여느 다른 인간 사회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계급으로 사람들을 철저히 나누고 그 계급으로
사람들은 부당하게 대우를 받게 된다. 여러 반란이 일어났지만 오랜 시간 동안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혁명을 준비했고, 이제
시간이 됬다. 과연 커티스의 혁명은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는 전체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축약해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최초의 인류는 동굴 속에서 어둠과 살았다. 꼬리칸은 마찬가지로 어둠이
만연하다. 커티스가 이끄는 반란인들은 앞칸으로 계속해서 전진하고 새해를 맞는 지점에서 다시 어둠의 공포를 경험한다. 어둠 속의
살육은 굉장히 참담하다. 이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갈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때 커티스는 불을 떠올린다. 횃불을 이용해 어둠을
밝히고 마침내 어둠의 공포를 몰아낸다. 인류는 불을 발견함으로써 어둠을 다룰 수 있었고 이 맥락은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에게
정확히 연결된다. 그리고 나오는 것이 바로 물이다. 물을 다루는 것은 초기 인류의 최대 과제였다. 인류가 물을 다루게 되는 순간
그들은 그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줄 작물들을 재배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농업 혁명을 이룩한다. 물 칸 뒤에 나오는 것은 식물칸, 수족관과 정육점이다. 물을 다룰 수 있는 인류는 최대의 의식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고 잉여생산물을 저장해야될 정도로 많은 양의 생상량을 가질 수 있었다.
수족관에서 스시를 먹고 난 뒤 커티스가 마주하는 것은 교육이었다. 교육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이 가진 지식을 후대에 전달하고 더 나은 사회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가장 중요했다. 이렇게 학교 같은
칸이 나온 뒤 등장하는 것은 총이다. 그전까지 기차에서의 싸움은 육탄전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총이 등장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과학 혁명이 일어난 후 인류는 진보하였고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런 과학 발달에 따른 이기들이 인류 사회를 더 발달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하
지만 그들의 믿음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뻔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산산조각이 났다. 결국 인류는 자신들이 이루어낸 기술의
발달을 다룰 윤리와 양심이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학교칸에서 실탄이 장전된 총이 등장하였고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총과 같은 과학 문명의 결과들이 등장하게 되지만 결국에 그 과학 문명의 이기들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고 절대로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 앞 칸의 사람들은 의식주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양질의 고기들이 매일 제공되
며 그들은 편안히 책을 읽고 자신의 취미 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다.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일들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쾌락의 유혹에
빠져든다. 이렇게 클럽에서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한 사람들이 가장 앞에 있는 것은 결국에 인류가 걱정이 전혀 없는 안락함 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오직 육체적인 쾌락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꼬리칸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하루하루 닥쳐오므로 쾌락은 그들에게
사치이다.
하지만 기차는 꼭 인류 역사의 연대기와 같이 꼬리칸과 앞칸 사이의 배열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또한 현 사회의 무서운 계급
사회를 나타낸다. 기차에서 모든 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은 맨 앞칸의 엔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엔진은 성스럽고 고귀하며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마치 신의 존재를 연상시킨다. 기차는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 때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산업 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초기 산업 혁명 시기에 부의 전반적인 불공정한 분배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초래하였고 결과적으로 자본에 의한 계급이 생겨났다. <설국열차>에서의 엔진은 바로 그 자본주의 자체를 의미한다. 엔진은 기차에 타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꼬리칸 사람들과 앞칸 사람 사이에는 엔진이 주는 혜택의 철저한 경계가 존재하고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의한 빈부격차와 많이 닮아 있다.
또한,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에 엔진의 한 부품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게 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겉의 화려함 이면에 자리 잡은
구조적 모순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앞 칸 사람들이 누리던 풍요는 꼬리칸 아이들의 노동에 기인한다. 그들의
노동 없이는 앞 칸 사람들 그 누구도 양복을 맞추거나 사우나를 즐길 수 없다. 영
원할 것만 같고 모든 풍요를 보장해줄 것만 같은 엔진은 아이들의 노동을 착취하며 기차를 움직인다. 우리가 좋아하는 나이키 운동화,
축구공, 애플사의 아이폰 등은 전부 제 3세계의 아동 노동 착취의 결과로 생산이 된다. 이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큰 상징이며
우리는 이 상품들을 사용함으로써 이 세계의 진보를 찬양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한번도 에어맥스를 신어 보지 못했으며,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공을 만들면서 축구를 제대로 해본적이 없고, 스마트폰을 이용해 게임 하나도 못해본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오늘도 지문이 거의 닳아 해졌음에도 축구공 실밥을 꿰맨다.
봉준호는 사회를 보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과 깊은 통찰력으로 우리 사회를 꿰뚫고 그 어두운 단면을 그대로 기차에 실어 넣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모습과 모순들을 가득 실어 담은 기차는 결국엔 철로 밖으로 벗어나게 되며 파괴된다. 거기에 나는 물론
승객들의 죽음 이전에 감독이 담아낸 부정적인 모습의 사회 구조의 해체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감독의 신호들을 보면서 다소 통쾌함을
느꼈다. 감독이 의도한 데로 기차가 파괴된 후 살아난 두 아이들에게 곰이 희망 가득찬 미래를 상징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우리
주변에 만연한 구조적 모순들을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결말이 좀 더 다른 방향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마지막에 커티스의 혁명은 그 힘을 잃어가고 생명력이 없다. 커티스는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는데 이것은 맨 앞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자리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윌포드가 부여한 운명 때문이다. 윌포드를 죽이고 자신이 원래 생각 했던 그 뜻을 이룰
것인가? 아니면 윌포드처럼 기차의 질서와 엔진의 영속성을 위해 살 것인가? 요나(고아성)이 성냥을 달라고 오지만 커티스는 그런
요나가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미 그는 윌포드와 같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자신의 혁명의 이유는 윌포드를 죽이고 기차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었지만 혁명을 뒤에서 이끌어온 윌포드의 계획은 기차
내부의 질서 재확립이었고, 그 질서 확립은 전체 꼬리칸 승객 수의 74%만을 살리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했고, 혁명은 이 방법을
이끌어 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이를 깨달은 커티스는 엄청난 목적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고 윌포드의 설득을 듣는 내내
무기력함을 느낀다. 나는 여기서 새로운 윌포드로 커티스가 등장하게 되며 기차의 계급 구조를 유지하며 영원한 비극적인 결말로 이
영화가 끝이 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