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 후에, 마음이 불편해지고 가끔 씩은 우울함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지만 언젠가는 꼭 봐야 했었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들이 이에 해당되는데요. 라스 폰 트리에와의 첫 만남은 뮤지컬 같지 않은 뮤지컬 영화 “어둠속의 댄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중학교 3학년일 때 이 영화가 개봉했었네요. 마이 페어 레이디, 쉘부르의 우산, 사랑은 비를 타고 등의 주옥같은 고전 뮤지컬 영화들을 즐겨봤던 저는 뮤지컬 영화라는 말 하나만 듣고 주저 없이 ‘어둠속의 댄서’를 선택했지만 그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힘겨운 영화였습니다. 게다가 여주인공의 답답함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오히려 그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 결국 이 감독들의 영화를 찾게 되더군요. 그리고 작년에 칸 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이고 1년여가 지나서야 개봉하는 멜랑콜리아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전과 달리 이제는 그의 영화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영화 속 저스틴이 종말을 예견하면서도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처럼, 분명 우울한 영화인 건 맞는데 보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감독의 진심이 전해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중요한 이유는, 라스 폰 트리에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저와 비슷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약 8분간 의 프롤로그 시퀀스를 보여 줍니다. 사실상 영화의 전체 스토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데요. 인위적인 화면과 주인공들의 비현실적인 액팅, 그리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이 흐르면서 마치 오페라 공연장에서 서곡을 들을 때의 느낌을 자아냅니다.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순간이죠. 여기서 바그너의 음악은 상당히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합니다. 실제로 바그너 이전의 오페라는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에 중점을 두었다면 바그너에 이르러서 오페라에서 내면적인 고뇌에 휩싸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해결하는 주인공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요.바그너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북유럽 및 중세 신화와 결합시켜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복잡한 화음과 대위법은 바로 이러한 인물의 고뇌를 심화시키는 음악적 기법이었죠. 또한 이졸데는 대의를 저버리고 사랑을 선택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말에 다다르고 말죠. 영화 속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결말과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우울, 불안은 결국 오페라 속 이졸데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상된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바로 작년 칸 영화제를 떠들썩하게 했던 감독의 나치 옹호 발언입니다. 사실 저는 당시 기자회견의 배경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데요. 영화 속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 순간, 나치 시절 때 바그너의 음악이 민족주의를 증폭시키고 체제를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점을 떠올렸습니다. 실제로 바그너도 반유대인주의자로서 유대인인 멘델스존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죠. 그렇다면 그가 이 음악을 사용한 것은 영화의 줄거리와 인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으로 짐작해 보았을 때, 결국 오늘날에는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받는 바그너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모순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쓰지 않았을까 하는 억측일 수도 있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작년 기자회견에서는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ㅎㅎ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그럼 본격적으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려합니다. 사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2부작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로서 행복한 결혼식을 앞두지만 결국 심한 우울증세를 보여 파혼을 당하는 저스틴의 이야기이고 2부는 저스틴의 언니이자 부호의 아내로서 겉으로는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지만 지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소행성 “멜랑콜리아”로 인해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는 클레어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자매의 이야기는 장 주네의 “하녀들”에서 그 모티브를 따 왔다고 하는데요. 자매를 다룬 대부분의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이 영화에서도 애증의 관계를 띄고 있습니다. 1부에서 클레어는 성심성의껏 저스틴의 결혼식을 준비하지만 동생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노심초사하고 2부에서는 저스틴이 소행성의 충돌을 두려워하는 클레어를 다독이고 위로하기는커녕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인간은 종말을 맞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저스틴을 두고 클레어는 “나는 가끔씩 네가 죽도록 미워.”라고 말하는 데요. 이 한마디가 이 둘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자 우리네 인생사에서 인간관계를 둘러싸고 흔히 떠올리게 되는 생각이죠. 즉 라스 폰 트리에는 그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간관계와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저스틴의 이야기는 화면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되었습니다. 이는 라스 폰 트리에가 이전에 참여했던 도그마 선언을 떠올리게 하고, 저스틴의 불안한 심리를 증폭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결혼을 앞두고 행복해야 하지만 결혼식장에서 그녀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들을 보이죠. 사실 이 결혼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진정으로 결혼을 축하하러 온 것인지 의심스러운 인물들로 가득합니다. 호색에 빠진 음탕함을 보이는 아버지, 결혼은 불행의 씨앗이라고 하는 어머니, 처제에게 비우호적인 형부, 결혼식장에서조차 저스틴에게 번뜩이는 문구를 생각하라고 종용하는 상사, 그리고 저스틴에게 그 문구를 따오지 않으면 당장에 해고될 위기에 처한 부하직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결혼식과는 거리가 멀죠. 이 결혼식장에서는 인간을 둘러싼 모든 욕망이 다 드러나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성에 대한 욕망이자 부에 대한 욕망이죠. 그리고 결혼을 저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일부다처제의 결혼제도에 대한 회의감마저 자아냅니다. 어쩌면 감독에게 있어 인간의 이러한 모습은 모두 부질없고 조롱할 만한 모습들인지도 모르죠. 저는 이 결혼식 장면을 보면서 보쉬의 “쾌락의 정원”이라는 그림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존 에버릿 밀레의 <오필리아>,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뒤러의 <멜랑콜리아>, 카라바지오의 <골리앗 머리를 든 다비드> 등 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모티브로 심어 놓았는데요.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그림을 떠 올린 것은 이 그림에서 묘사된 타락한 인상의 모습과 영화 속 결혼식의 인간 군상이 너무나도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저스틴의 우울증세가 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피로연에서 연주되는 노래 중 하나가 “Fly me to the moon"인데 저스틴은 진심으로 이 지구를 떠나 달로 날아가고 싶었고 어쩌면 2부에서 등장하는 멜랑콜리아를 반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결국 결혼식은 파혼으로 끝나고 2부에서 클레어의 불안감이 집중적으로 묘사됩니다.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을 두려워하고 극심한 공포를 보이지만 남편은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비켜갈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맹신하죠. 하지만 결국 그러한 이성에 대한 믿음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이라는 무책임한 선택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형부의 행방을 묻는 저스틴에게 시내에 나갔다는 거짓말을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죠. 여기서 저는 저스틴을 보면서 라스 폰 트리에가 그 동안 다루어 온 여성 캐릭터들 중 가장 공감가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에게 있어 라스 폰 트리에 영화의 여성들은 이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남편의 회복을 위해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파는 여인, 어둠 속의 댄서에서 모든 억울함과 누명을 뒤집어 쓰고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사형당하는 여인 등 보는 사람을 답답하고 화나게 만드는 인물들 뿐이었죠. 이러한 감정은 도그빌에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그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는데요. 이 영화들을 볼 때만 해도 감독이 여성의 고통을 바라보고 즐기는 사디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 나온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작업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런데 이 영화 속의 두 여주인공은 전작의 캐릭터들과는 달랐습니다. 클레어는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공감을 자아냈고 저스틴은 2부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예지자, 그리고 멜랑콜리아가 등장하자 전라의 모습으로 그 빛을 느끼는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 줌으로서 마치 모든 불안감을 떠안는 신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시네토크에서 심영섭 평론가 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트리에의 영화에서 남자들은 죄다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묘사가 된 데 반해 이 영화에서 두 자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의 마음에 자리잡는 모습을 보여 주지요. 아마 제가 예전에 답답하다고 느낀 다른 영화속 인물들도 지금 보면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부분은 좀 더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2부의 결말은 앞의 프롤로그에서 보여진 그대로 진행됩니다. 일말의 희망마저 꺾어놓고 말지요. 하지만 아직도 그 탐미적이고 치명적인 컷 하나하나를 잊을 수가 없네요. 1부와 달리 2부는 마치 비현실적인 세계처럼 정교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승마를 할 때 마치 희망의 빛처럼 내리쬐던 순간, 멜랑콜리아가 등장할 때의 아름다운 푸른 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스틴과 클레어, 그리고 클레어의 아들이 나뭇가지로 만든 동굴 안에서 손을 잡고 묵시록을 맞이하던 순간의 강렬함은 지금도 머리 속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분명 종말을 다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저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안해짐을 느꼈습니다. 결국 인간은 서로의 이해관계와 생각의 차이에 휩싸여 서로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점들에 불과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우쳐주기 때문이었지요. 사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빛나는 순간보다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습니다.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강자는 권력을 이용하여 약자를 서슴없이 탄압해 왔죠. 오늘날은 어떤가요. 여전히 세계의 곳곳에서 인간이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강대국의 논리에 따라 세계질서가 재편되는가 하면 부의 유무에 따라 삶의 질이 극명히 달라지는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인간인 것이지요. 라스 폰 트리에가 가장 관심을 가져왔던 주제도 결국 인간의 불완전성과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났을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 지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영화 “멜랑콜리아”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인간은 애초부터 불완전하고 허점으로 가득 찬 존재이니 그 점을 인정하고 서로 연대하면서 살아가야 앞으로 찾아올지도 모를 더 큰 파국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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