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예상과 짐작, 상상없이 닥치는 충격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목청껏 소리쳐도 아무도 와줄 것 같지 않은 벌건 대낮의 교외, 일말의 상식도 공유하고 있지 못한 듯 보이는 현지인과 맞닥뜨린 알량한 도시인의 상황. 인적 드문 곳으로 젊은 제자를 꾀어낸 음대 교수 영선(이병준)과 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모른 척 따라왔던 인정(차예련)의 줄다리기를 보여주며 블랙코미디처럼 시작한 <구타유발자들>은 기본적으로 공포영화다. 다시 보고 싶지 않지만, 헤어날 수 없는 악몽이다. 달아난 인정을 기다리던 영선 앞에 심상찮은 동네 토박이 오근(오달수)이 출현한다. 여기에 나사가 빠진 듯한 홍배(정경호)와 원룡(신현탁) 무리와 이들이 악랄하게 왕따를 시키는 고등학생 현재(김시후), 마지막으로 이들의 우두머리 봉연(이문식)까지 합류하면, 이 악랄한 마당극의 무대는 완성된다.
<구타유발자들>이 진짜 무서운 것은 그 순환에 있다. 끝을 보기 전에는 퇴장할 수 없는 문제적 상황. 이는 인정과 영선이 초반부에 맞닥뜨리는 동네의 양아치 경찰 문재(한석규)를 포함하여, 여덟명의 등장인물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도망친 인정이 하필이면 봉연에게 길을 묻고 그의 오토바이에 실려 다시 영선에게 돌아오는 것도 기가 막힌데, 이번에는 짐승 같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얄팍한 욕망 하나 해소하지 못하는 영선은 고등학생에게까지 얻어터지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끝내 대접받지 못한다. 임시번호판도 떼지 못하고 모래밭에 처박힌 것도 모자라 돌에 찍히고, 아스팔트 위를 구른 끝에 견인되는 자신의 벤츠와 같은 운명이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던 문재가 발견하는 것은 오래전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대가다. 인정을 서울에 데려다주고 영선의 차를 빼주려는 등 봉연의 호의는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드러나는 것은 서울 손님들의 뻔한 거짓말뿐이다. 군대에서 구타를 당해 귀가 먼 오근, 현재를 괴롭히다가 학교에서 잘린 홍배 역시 마찬가지다.
<구타유발자들>의 공포와 일반적인 호러영화의 공포 사이의 간극은 날것의 생생함에서 비롯된다. 등장인물들은 실제로 구타를 주고받는 듯 보이고, 두 세대의 카메라를 쉴새없이 동원하여 포착한 화면은 실제 사건의 현장을 목격하는 이의 시선을 닮았다. 114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중 구타장면이 차지하는 체감비중은 90%에 육박하는데, 극장 문을 나서면 난타를 당한 듯 몸이 아프다.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힘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야만 성립되는 구타는 가장 원초적인 폭력으로, 맞는 사람과 때리는 사람 모두의 영혼을 잠식한다는 평범하고도 잊기 쉬운 진리를 일깨우는 것이 아마도 영화의 가장 큰 목표일 것이다. 결말을 향해 정직하게 달려가는 영화가 품은 유일한 반전은 광기어린 폭력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쉽게 감정이입을 허락하지 않던 차가운 카메라는, 봉연 역시 물고 물린 먹이사슬 속 일부였음을 보여주기 위해 길고 중요한 시간을 할애한다. 폭력을 전시함으로써 폭력을 유발할 수 있다는 어떤 오해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이룬 최고의 윤리적 성취라면, 가장 중요한 봉연을 향한 감정이입을 거칠게 강요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타유발자들>은 대중영화의 외연을 최대한 넓히기 위해 영리하게 고민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의미있는 상업영화다. 일찍이 <자장가> <빵과 우유> 등 형식과 내용을 제약함으로써 관객을 끌어들이는 똑똑한 단편을 만들었던 원신연 감독의 첫 번째 장편 <가발>은 어울리지 못한 옷처럼 어색하고 싱거운 데뷔작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두 번째 영화를 통해 상업영화 시스템의 제약과 의욕 과잉의 난제 속에서 자신의 화법을 찾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인다. 한정된 시공간에서 한정된 등장인물만을 운영하겠다는 그의 도전은 능란한 완급조절의 연출력과 함께 연극 같은 상황에 기꺼이 뛰어든 숱한 배우들의 극진한 연기를 끌어낸 것으로 의의를 인정받을 만하다. 곤경에 처한 인물을 바라보며 웃다가도 문득 그 웃음이 소름끼치게 여겨지도록 배치한 서늘한 유머는,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몰지각한 한국식 코미디에 신선한 자극이 될 법하다.
<구타유발자들>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또 다른 지점은 소름끼치게 창백한 화면의 질감이다. 전반적인 화면은 영화가 진행되고 구타를 더할수록 핏기를 잃지만, 점점 강렬해지는 핏빛 폭력은 고스란히 관객의 시각을 자극한다. 다섯 시간 동안 실외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달음에 묘사하는 이 영화가 석달에 걸쳐 촬영됐다는 사실은 일정한 톤의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단편 때부터 감독과 함께 일했던 김동은 촬영감독은 최소한의 조명기만으로 태양광과 디지털 색보정)DI) 등의 후반작업을 통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밖에도 기동력있는 두대의 카메라를 상시적으로 운영하는 현장 시스템에선 영화의 내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최적의 조건을 찾아낸 감독 이하 제작진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물론 원신연 감독이 구사한 경멸과 혐오의 화법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고, 극단의 폭력으로 비폭력을 말하는 <구타유발자들>의 반어법은 절반의 성취를 거뒀다. 의욕적인 도전이 깊이있는 성찰과 사려깊은 유머를 획득하는 것은 여전히 감독에게 남겨진 과제다. 사실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잊고 웃음과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관객에게 <구타유발자들>은 꽤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다. 연극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우리가 외면했던 어떤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영화 속 모든 유머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며, 하나같이 비호감인 허점투성이 캐릭터 중 누구 한명의 처지를 극진히 슬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애써 돌아보기로 마음먹는다면, 이 영화는 웬만해선 잊혀지지 않을 경험을 선사한다. 관람의 즐거움 역시,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값진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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