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작품번호 4번 <생활의 발견>은 감독의 모든 영화를 꿰뚫는 제목을 가졌다. 허위의식과 인과율의 미망(迷妄)을 걷어내고 살아 움직임(生活)의 정체를 직시하는 작업, 현실이 비로소 현실로 보일 수 있도록 ‘알맞은’ 양식을 부여하는 스위스 시계공 같은 작업이 홍상수 감독의 지난 10년이었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가 그리는 인간과 그들의 일상이, 달리 아무것도 되지 않도록 정밀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를테면 무엇의 상징이나 내러티브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의 영화에서 자고새는 그저 자고새다. 그렇게 발견한 현실의 파편을 재구성하는 홍상수식 패턴은 대구와 반복, 모방과 차이였고, 덕분에 사람들은 그가 지식인의 위선과 소시민적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조롱하고 있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작품 편수가 거듭되면서 홍상수 감독의 ‘일상’은, 꿈과 회상을 끌어들이며 영역을 슬금슬금 넓혀왔다. 꿈꾸고 회상하는 동안에도 생의 시계는 어김없이 간다는 점에 홍상수는 주목했다. 작품번호 6번 <극장전>에 이르러서는 ‘영화보기’가 일상의 한 평면으로 편입된다. 그렇다고 <극장전>이 영화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그런 유의 영화에 있게 마련인 필름메이커의 자기연민이 <극장전>에는 없다. <극장전>은 영화를 본 뒤 그 여파로 의식이 지면에서 슬쩍 떠 있는 유체이탈과도 같은 특수한 일상에 착안한다. 영화는 상원과 영실이 나오는 단편영화 <극장전>과 이 영화가 자신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믿는 동수가 극장에서 나와서 겪는 1박2일의 체험으로 나뉜다. 회상과 꿈, 도취의 시간도 일상의 표면이라는 점에서 균질하다고 보는 감독은 영화 속 영화와 동수의 이야기를 형식적으로 구별없이 찍었다.
영화 1부에 해당되는 극중 영화가 시작되면 열아홉살의 청년 상원(이기우)이 형에게 용돈을 탄다. 짐작대로 이 돈은 술값과 여관비로 지출된다. 종로를 거닐던 상원은 어떤 사연인지 학교를 중퇴한 첫사랑 영실(엄지원)과 재회하고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인다. 모성애에 관한 연극과 첫사랑의 출현은 상원을 고양시킨다. 그날 저녁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섹스를 시도하던 상원과 영실은 갑자기 “깨끗이 죽자”고 의기투합한다. 이 외침은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가 내뱉은 대사의 메아리인데 이번에는 실천이 따른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샤워, <강원도의 힘>의 낙서 지우기, <오! 수정>의 시트 빨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강간당한 애인 씻어주기로 표현된 ‘지우기’의 간절한 제스처는, <극장전>에서 아예 삶 자체를 지우고 깨끗해지려는 자살기도로 비약한다. 반환점에 이른 <극장전>은 선배 감독의 회고전에서 극중 영화 <극장전>을 보고 나온 동수(김상경)의 이야기로 ‘줌아웃’한다. 감독지망생 동수는 저녁의 선배 돕기 동창회에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여배우 영실(엄지원)과 거짓말처럼 마주친다. 자기를 모델로 썼다고 믿는 영화와 선배의 불행, 여배우와의 만남은 동수를 들뜨게 한다. 그는 영화의 잔상에 휩쓸리는가 하면 거꾸로 영화의 이면을 안다는 이유로 잘난 척하기도 한다. 영화 속 장소를 배회하고 영화 속 노래를 흥얼대며 동창회까지 시간을 죽이던 동수는 모임에 온 영실을 집요하게 따라붙어 술자리와 여관까지 동행한다. 언제까지나 붙잡고 싶은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뒤 살고 싶다고 울먹이는 선배를 문병한 동수는 다시 제대로 살아보자고 다짐한다.
홍상수 감독은 <극장전>에서 가장 인위적인 영화기법으로 알려진 줌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에서 와이프아웃으로 장면을 전환하는 것과 거의 맞먹는 빈도로 구사한다. 도리어 흥미로운 점은 이 파격이 홍상수의 세계를 크게 흔들어놓지 않는다는 인상. 팬, 틸트와 결합해 컷을 대신하는 줌은, 마치 약간 의자를 당겨앉거나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상을 ‘귀엽게’ 관찰하는 시선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인상을 부추기는 것은 전작과 달리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는 인물들이다. 한국영화 캐릭터의 만신전에 올라 마땅한 김상경의 동수는 성장과정에서 한 단계를 빼먹은 듯한 남자다. 골똘한 생각 끝에 엉뚱한 말을 뱉고, 별걸 다 기억하면서 친구의 오랜 신체장애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괴짜가 그다. <생활의 발견>의 경수와 더불어 <극장전>의 동수는- 넓게 보면 그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상원까지 포함해- 상투적 패턴에 갇혀 살면서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이따금 아무도 안 들리게 다짐하는 홍상수적 인간상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한다. 한편 홍상수의 히로인 오윤홍, 이은주, 예지원을 잇는 독특한 음색의 엄지원은 “당신이 사랑하긴 뭘 사랑합니까?”, “뚝! 이제 그만!” 같은 호통으로 은밀한 카타르시스를 객석에 선사한다.
<극장전>은 웃기는 영화다. 심각한 이야기를 할수록 웃음부터 새나온다. 홍상수 영화에서 말은 말이 아니라 불완전한 은폐와 과장의 부스러기라는 사실이 이번만큼 명백한 적은 없었다. <극장전>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영화다. 상원과 영실이 자살에 합의한 이후 일련의 장면들은 줄곧 예측불허다. 온갖 이야기 구조에 대비를 갖춘, 내러티브 영화의 훈련된 관객은 텅 비어 있는 이 이야기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다행스런 의미에서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극도로 증류된 내러티브 안에서 환경의 영향과 자유의지 사이에 불편하게 끼어 있는 인간의 시간을 주시하고 있다. 홍상수에게는 여전히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어떻게 말하느냐가 곧 홍상수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무엇’이다. 인과관계에 기대지 말 것. 관습적 이야기로 안전그물을 치고 약골처럼 굴지 말 것. 다만 <극장전>에서 달라진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홍상수 감독의 정서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정서 사이의 거리다. 홍상수 감독은 “내 영화가 어둡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를 포함한 인간을 혐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독보다 훨씬 비위가 약한 관객은 그가 인간을 가리키면 괴물을 보곤 했다. <극장전>에서는 감독이 한 남자가 영화에 빠진 날을 구경하며 미소지을 때 관객도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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