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부르긴 하나 인간이 사회가 변해가는 속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의 의식은 오랜 시간동안 환경에 의해 형성되고, 그만큼 그것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넉넉잡고 그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회는 인간을 알아서 스스로의 흐름에 끼워넣어 줄 정도로 친절하진 않아서, 인간은 변화하는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금방 내팽개쳐져 주변인으로 남고 만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을 보고 심지어는 사회에서 '변절자', '배신자'라는 딱지까지 붙이기까지 한다. 그저 난 내 의식을 지킨 것 뿐인데, 단지 잠시 뒤쳐졌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겁한 배신의 아이콘으로 돌변하고 마는 것이다.
<의형제>는 이렇게 사회의 흐름에 무사히 합류하지 못한 주변인들의 이야기다. 영화 속의 남파공작원과 그를 쫓던 전직 국정원 요원은 겉으로 보기에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 같지만 실은 세상의 변두리를 원을 그리듯 맴돌고 있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전혀 다른 처지에 있는 듯 하지만 실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던 장훈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서 보다 넓어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 형성에 주목한다. 그 공감대는 쓰디쓴 비통함으로, 훈훈한 유머로, 대담한 에너지로 다가온다. 유머와 정색의 완급을 절묘하게 조절하며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이야기'라기보다 '인간의 이야기'에 도달하는 이 영화는 올 겨울에 만난 한국 영화 중 가장 빼어난 모양새를 지녔다고 할 만하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한창 화해 무드가 조성될 무렵인 2000년, 그 뒤편에는 여전히 남북간의 피말리는 첩보전이 진행 중이다. 국정원 요원 이한규(송강호)는 비밀리에 암살 임무를 수행하려는 남파공작원들을 신속히 잡아들이기 위해 상부 보고 없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진행한다. 그러나 작전은 예상치 못하게 틀어지고 공작원들은 놓치고 인명피해만 발생하고 만다. 결국 그 책임을 물어 한규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고되고 만다. 한편 공작원 중 한 명인 송지원(강동원)은 국정원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배신 혐의로 작전 우두머리인 일명 '그림자'(전국환)로부터 내팽개쳐지고 만다. 그렇게 6년이 지나고, 한규는 행방불명된 이들을 찾아주는 흥신소 일로, 지원은 시멘트 공장 일로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인연은 인연인지 한규와 지원이 재회하게 되고 단박에 서로의 정체를 알아챈다. 여전히 국정원 일에 미련이 남은 한규는 지원을 잡아들이기 위해 뭔 꿍꿍이 속인지 지원에게 동업을 제안하고, 무슨 이유인지 돈이 궁한 지원은 고심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서로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살얼음판 같은 그들의 동업이 시작된다.
장훈 감독은 데뷔작인 <영화는 영화다>에서 대등한 레벨의 두 꽃미남 배우를 캐스팅해 박빙의 이미지 승부를 펼쳤다면 이번 <의형제>에선 매우 상반된 이미지의 두 배우의 만남을 통해 결국은 기묘한 동질감을 형성시킨다. 물론 두 배우는 기존의 이미지가 사뭇 상반된 만큼 영화 속에서도 서로 다른 영역을 담당한다. 송강호가 예의 능글맞은 연기로 웃음과 리얼리티를 책임진다면, 강동원은 보다 우월한 시각적 이미지와 독특한 분위기를 앞세워 그 반대편에서 음침한 그늘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한 영화에서 만날 것이라 쉽게 짐작하지 못한 이 두 배우가 한 영화에서 빛과 그림자의 역할을 하며 서로 보완 작용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 영화만의 재미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송강호는 <의형제>에서도 여전히 '정말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인 것처럼 연기한다. 쿨한 척 하지만 일 자체에 대한 애착보다는 생계를 위해 일에 무섭게 매달릴 수 밖에 없는 한규의 모습이 송강호 특유의 구렁이 담넘어가듯 술술 풀리는 유머감각과 재지 않는 구수한 연기를 통해 현실화된다. 송강호는 늘 일관된 듯 하면서도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영화마다 확연히 다른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하면서도 넌지시 훈훈함을 드러내는 티나지 않는 인간미가 담긴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역시 감정을 소비하지 않으면서 그 감정을 선뜻 느끼게 할 줄 아는 장훈 감독과 호흡이 꽤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 강동원 역시 그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항간의 평에 의하면 영화를 보면 송강호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던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강동원도 충분히 각인될 만한 연기를 보여줬다고 본다. 그는 처음에는 철저한 교육으로 인간병기처럼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주다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상황 앞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점점 흔들리고 무너지는 모습을 묵직하게 표현해낸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난 누구도 배신한 적이 없다며 울먹이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감정의 파장을 남기는 장면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는 현실의 어두운 그늘을 꽤 잘 전달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여전히 지존의 위치에서 마치 놀듯이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노련한 톱배우와 불과 두달도 안되는 사이에 전혀 다른 얼굴을 꽤 능숙하게 하고 나올 만큼 실력이 쌓여가는 젊은 배우를 함께 만날 수 있다.
영화가 워낙에 한규와 지원 두 캐릭터에게 집중되어 있긴 하나 몇몇 조연배우들의 연기도 돋보인다. 특히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익숙한 얼굴은 아니지만 그림자 역의 중견배우 전국환 씨는 예상치 못하게 강력한 악역 연기를 보여준다. 매 작전마다 '벌써부터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군' 하며 앞으로 있을 혈전을 암시하는, 이웃집 할아버지같은 인상 속에 숨겨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면모는 이 영화에 살벌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불어 특별출연급이긴 하지만 한규가 현상금을 위해 쫓다가 결국 한규에게 감화되고 마는 알고보면 착한(?) 라이따이한 역의 고창석이 던지는 짧지만 굵은 코믹 연기도 일품이다.
장훈 감독은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그가 역시 김기덕 감독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음을 보여줬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강한 남성성도 그랬고, 김기덕 감독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질펀한 폭력과 어딘가 찜찜한 비극성을 담은 결말이 그랬다. <의형제>를 보고나니, 장훈 감독은 처음엔 김기덕 감독의 영향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보다 대중적이고 흡인력 강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는 유머와 액션을 식상하지 않고 영리하게 구사할 줄 안다. 얕은 언어 유희를 이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과장된 슬랩스틱 코미디나 화장실 유머를 쓰지도 않으면서 상당히 새로운 방식으로 웃음을 이끌어낼 줄 안다. 이한규가 송지원에게 난 너의 얼굴도 모른다며 꼬드기면서 실은 책상 한켠에 송지원의 사진이 붙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장훈 감독의 참신한 유머감각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그 외에도 한규와 라이따이한이 맞닥뜨린 상황에서 펼쳐지는 자막과 외국어 개그 또한 새로워서 관객들이 웃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심지어 일말의 휴머니즘마저 느끼게 하는 유머 감각이다. 여기에 초반부터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자동차 추격신이나 공장에서의 개싸움과 같은 액션신, 후반부 총격전 등은 담백한 에너지로 가득한 액션 장면들로 관객들의 눈마저 자극한다.
그런데 감독은 이런 오락성에서 그치지 않고 냉탕과 온탕을 기가 막히게 왔다갔다 한다. 그는 웃음의 반대로 신파가 아닌 비정한 현실을 선택하는데, 영화 속에서 어느 순간 넉살좋게 웃기다가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섬뜩함에 표정이 얼게 만드는, 관객의 정서를 난데없이 바짝 조일 줄 아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한규와 지원이 동업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헐렁한 에피소드들과 바로 다음 순간 모습을 나타내는 긴장 관계는 줄타기를 하듯 관객의 심리를 쥐락펴락한다. 그것도 영화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 어느 한 부분에 유머나 스릴을 몰아 주는 방식이 아닌, 시시때때로 오간다는 점에서 더욱 능청스런 전개라 할 만하다.
이런 감독의 능력이 어우러져서 <의형제>는 어느 한 방향으로 무리하게 휩쓸리지 않는, 정서적 균형이 이루어진 영화가 되었다. 질퍽한 현실을 이야기하되 유머를 곁들여 너무 침울하게 빠지지 않고, 유머 중간중간에 섬뜩한 현실을 환기시킴으로써 가벼움에서 벗어나고, 휴머니즘을 드러내되 은근하고 쿨한 태도를 끝까지 유지한다. 이런 균형 잡힌 상태에서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자연스럽게 관객의 가슴에 흡수된다. 전작에서도 별난 사람들을 통해 오히려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던 장훈 감독은 이 영화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보다 많이 끌어들인다.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남파공작원과 전직 국정원 요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꽤 비중있게 다뤄지는 이주 외국인들이 그들이다. 각자가 유별난 상황에 처했지만 이들로부터 비롯되는 일종의 동질감은 결국 이들 모두가 다르지 않은 위치에 있고, 나아가 우리들 대다수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은 위치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모두 사회 주류에 원활히 편입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튕겨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한규에게 국정원 일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일 뿐인데 남북 문제가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그는 본의 아니게 변화하는 사회에 편승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보수 꼴통이 된다. 지원 역시 자신은 맹세코 누구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나라로부터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채 가족과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지속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된다. 한때는 극과 극에 서서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을 맴도는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어느덧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의식은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쫓아다니던 이주 외국인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적잖이 느낄 수 있다. 처음에 한규에게 그들은 추노꾼이 노비들 대하듯 역시 돈벌이를 위한 수단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았으나, 지원과의 대립을 통해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변수들을 통해서 이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행복하고 싶은데,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담보로 해야 하기에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는 주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한규는 쉽게 인정할 수 없었던 주변인으로서의 자신을 지원을 통해 비춰보게 되고, 자신이 돈벌이 수단으로 쫓기만 하던 외국인들을 통해 점점 깨닫게 된다.
쉽게 바꿀 수 없는 매몰찬 현실이 반영되어 있기에 한국 영화 특유의 '리얼리즘'을 이유로 영화는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는 듯 하지만 다행히도 그렇지 않다. 각자의 특수한 위치를 넘어서는 동지애를 확인하며 흐뭇한 희망을 남긴다.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그들의 우정을 현실은 절대 녹록치 않다는 이유로 짓밟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현실에 쿨하게 맞선다. 질질 끌면서 매달리지도 않고 무리하게 언성을 높이며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람 천성이 그런 걸 어떡해'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대응할 뿐이다.
어렵게 형성된 한규와 지원의 '형제애' 앞에 정말 냉정하기 짝이 없는 '그림자'는 '감상적인 새끼들'이라며 비웃는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그 말에 개의치 않는다. 감상적인 게 뭐 어때서, 이건 남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건데. 국적을 뛰어넘고, 이념을 뛰어넘어, 결국 모두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손을 내밀며 '의형제'가 되기에 이른다. 심지어는 영화를 보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들 역시 사회 진입이 맘처럼 쉽지 않은 현실을 깨달으며 그들의 태도에 동조하게 되고 말이다. 영화는 이러한 인도주의적 관점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괜히 오버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펼쳐나간다. '우리도 결국엔 똑같은 인간이랍니다ㅠㅠ' 라며 호소하지 않고, '그래, 우린 감상적이다'라면서 당연하게 맞서는 영화의 모습은 은연중에 드러나는 휴머니즘에 오히려 더 뭉클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의형제>는 한마디로 그 어느 부분에서도 과하게 나가지도 않고, 부족하게 덜 나가지도 않는다. 무서운 현실을 때때로 보여주지만 거스를 수 없는 그 현실만큼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역시 보여주며, 그 와중에도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보여준 인간의 본성이 씁쓸하고 어두운 부분이었다면, <의형제>가 보여주는 인간의 본성은 모두가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이미지다. 장훈 감독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설명하려 애쓰지 않고 오히려 쿨하게 내던지듯이 얘기하지만,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연못에 돌을 툭툭 던질 때 생기는 파문처럼 깊은 여운을 남긴다. 넘치는 감정만이 관객의 정서를 자극하는 건 아니다. 때론 가장 담백한 감정이 가장 피부에 잘 와닿을 때가 있다. 이 영화처럼.